위기가 곧 사업재편 기회… AI·차량용 반도체서 길을 찾다

입력 2023-03-14 04:05
국민일보DB
위기는 기회로 연결된다. ‘산업의 심장’이자 한국 경제의 ‘생명줄’인 반도체도 부진의 늪에서 반전 계기를 찾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지금이 되레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고 경쟁자를 따돌릴 절호의 시기라고 판단한다. 특히 인공지능(AI)·미래차 등 혁신기술은 반도체 산업에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신기술에 적용할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인공지능(AI)의 두뇌’ 역할을 할 AI 반도체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13일 “지금이 반도체의 미래에 대비하고, 기술 격차를 확대할 기회”라고 역설했다.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영역을 넓혀 새로운 기회를 잡을 ‘골든타임’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에선 생성형 AI와 자율주행 시스템의 급부상으로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폭증한다고 기대한다.

챗GPT와 같은 초거대 생성형 AI는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장치가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같은 초고속 메모리 반도체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병목현상’을 방지하고,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대폭 높인 제품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찌감치 HBM 관련 투자·개발을 진행해왔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업계 최초로 HBM에 AI 프로세서를 결합한 ‘HBM-PIM’을 내놓았다. PIM은 메모리 내부에 프로세서를 더하는 기술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6월에 HBM 4세대 제품인 ‘HBM3’ 양산을 시작했다. HBM3은 초당 819GB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엔비디아의 H100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탑재된다. 업계 관계자는 “HBM 같은 제품은 고가에다 전력 소모가 많아 폭넓게 사용되진 않았는데, AI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새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스템 반도체도 주목을 받는다. 인텔, AMD, 퀄컴, 엔비디아 등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기업) 기업이 강세를 보이는 분야다. 하지만 개별 AI에 특화한 전용 칩셋의 수요가 늘면서 한국 기업에도 기회가 오고 있다. 한국에선 스타트업들이 AI 반도체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SK스퀘어·SK텔레콤·SK하이닉스에서 함께 설립한 사피온은 2020년 11월 한국 기업 최초로 AI 반도체 ‘사피온 X220’을 출시했고, 하반기에 X330을 선보일 예정이다. 퓨리오사AI는 지난해 AI 반도체 ‘워보이’를 내놨다.


전기차·자율주행차의 확산은 차량용 반도체에 날개를 달았다. 시장조사기관 IHS는 세계 차량용 반도체 수익이 올해 760억2700만 달러에서 오는 2028년에 1298억3500만 달러까지 급성장한다고 예측한다. 삼성전자는 차량용 반도체인 시스템온칩(SoC), 모뎀, 메모리, PMIC(전력관리), LED(발광다이오드)를 양산하고 있다. 2015년에 처음 진출한 삼성전자는 2025년 차량용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근에는 첨단 5나노 파운드리 공정으로 미국 AI 반도체 기업 ‘암바렐라’의 자율주행 차량용 반도체 생산에 돌입했다. SK하이닉스는 저전력 더블데이터 레이드(LPDDR) 등의 메모리 솔루션을 차량용으로 공급 중이다. 자율주행차 등 스마트카의 경우 전력 소모량을 줄이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계에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육성이 시급하다고 지목한다. 반도체 공급난으로 파운드리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대만 TSMC는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50%를 넘기며 압도적 1위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등 주요 팹리스 업체는 TSMC를 가장 먼저 찾는다. 최근에는 퀄컴이 스냅드래곤7+ 1세대 주문을 삼성전자가 아닌 TSMC에 맡겼다는 보도도 나왔다.

삼성전자는 초미세 공정으로 역전을 노린다. 업계 최초로 3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도입하며 승부를 걸었다. 다만, 전문가들은 대만의 경우 국가 전체가 TSMC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어 삼성전자의 추격이 쉽지 않다고 우려한다. 이에 전문가들과 재계에선 반도체 산업이 ‘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도울 ‘K칩스법(조세특례제한특별법 개정안)’의 시행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회에 계류 중인 K칩스법은 국가첨단전략기술 설비에 투자할 때 세액공제율을 대기업·중견기업의 경우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끌어올리는 걸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표류 중이다. 반도체공학회 등 학계에서는 지난 8일 성명서를 내고 “반도체 산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K칩스법의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지난해 말 여야가 대기업·중견기업에 대한 세액공제를 8%로 높이는 내용의 조특법 개정안을 합의 처리했지만, 세액공제율이 턱없이 낮아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 확대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정부는 올해 1월 세액공제율을 상향 조정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여·야 갈등으로 K칩스법은 공회전만 하고 있다. 그나마 미국이 반도체지원법을 시행하려고 하면서 위기감이 커지자 정치권이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조민아 전성필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