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한 거리 동인천 개항로에 ‘명품 인문학’ 바람

입력 2023-03-12 20:27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김수환 추기경 등의 평전을 쓴 전기작가 이충렬씨가 지난 8일 저녁 인천 중구 동네책방 ‘개항도시’에서 ‘청자,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강연하고 있다. 책방이 기획한 릴레이 강연 ‘개항도시 인문학 시즌3-희망을 말하다’의 첫 행사가 열린 이날 인천과 부천 등에서 70여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인천=권현구 기자

동인천의 개항로(인천 중구)는 1883년 제물포항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이 제일 먼저 유입된 곳으로 오랫동안 인천의 중심지였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끼리 어깨를 스치지 않으면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번성한 동네였다. 하지만 부천, 송도, 영종도 등이 개발되면서 인구가 빠져나가고 상권도 무너져 쇠락한 원도심이 되고 말았다. 최근 인천시와 중구가 도시재생에 공을 들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인천항에서 신포동, 경동을 지나 배다리사거리까지 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개항로의 동쪽에 동네책방이 하나 있다. 답사여행 전문가이자 여가문화 연구자인 최석호(59)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이 지난해 6월 카페와 전시실, 강연장을 갖춘 책방을 열고 ‘개항도시’라는 간판을 달았다.

지난 8일, 평일 저녁이라면 거의 인적이 없는 이 동네가 오랜만에 떠들썩해졌다. 책방이 기획한 릴레이 강연 ‘개항도시 인문학 시즌3-희망을 말하다’의 첫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2층 강의실에 70여명이 들어찼다. 이충렬(69) 작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단원 김홍도, 동화작가 권정생, 김수한 추기경, 이태섭 신부 등의 평전을 쓴 독보적인 전기작가다.

“인천에 우현로가 있죠? 여기 근처죠? 그런데 우현로라는 이름이 왜 생겼는지 아세요?”

이 작가는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이날 강연 제목은 ‘청자,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청자를 한국미의 대표작으로 바라보고 수십 년에 걸쳐 청자 발굴에 매달려온 우현 고유섭과 혜곡 최순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작가는 “우현로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이자 개성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우현 고유섭의 호를 딴 거리”라며 “고유섭이 바로 동인천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얘기했다. 청자 이야기는 그렇게 인천 이야기로 이어졌다.

고유섭은 개항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용동큰우물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사’에 기록된 청자기와를 발굴하고자 했고, 1940년대 초 개성에서 청자기와 파편을 찾아냈다. 하지만 청자기와 가마터를 발견하진 못했다. 그의 뜻은 사후에 제자 최순우에게로 이어졌다. 최순우는 1964년 전남 강진군에서 온전한 청자기와와 가마터를 발굴했다.

이 작가는 고미술 분야의 우현 고유섭과 함께 현대미술 분야의 석남 이경성을 인천이 낳은 대표적인 미술계 인사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인물이 있어야 도시가 산다. 인천이 이런 인물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6월 동인천 개항로에 문을 연 동네책방 ‘개항도시’는 세 번째 인문학 강연 시리즈를 이어가며 퇴락한 이 지역에 시민들의 발길을 불러들이고 있다. 인천=권현구 기자

강연은 1시간 가량 진행됐다. 이 작가는 “이번 릴레이 강연 제목이 ‘개항도시 인문학 시즌3-희망을 말하다’인데, 인문학과 희망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인문학은 우리를 역사와 문화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의 길로 들어서는 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나갈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강연 참석자들은 인천은 물론이고 부천에서 온 경우도 있었다. 인천에 사는 주귀연(59)씨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청자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 그동안은 강의 들으러 서울로 많이 나갔는데 내가 사는 도시에 이렇게 좋은 문화공간이 생기고 이렇게 좋은 강의가 생겨서 너무 좋다”면서 “더구나 무료라니 감사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주씨는 또 “이 동네는 내가 20대 때 직장생활을 하던 곳”이라며 “그때는 개항로에 나오면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지금은 거리가 죽어서 아쉽다. 이 일대가 다시 살아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부천에서 왔다는 이화윤(60)씨는 “이 서점에서 하는 강연은 빼놓지 않고 오는 편”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는 강연 후에 강연과 관련한 답사 여행을 진행한다”면서 “책과 강연, 답사가 어우러진 대단히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번 청자 강연과 관련한 답사여행도 4월 중 진행될 예정이다. 강연을 한 이 작가가 서울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옛집을 안내한다.

서점 개항도시의 인문학 강연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7월까지 월 2∼3회씩 총 10회의 저자 강연이 열린다. ‘백반기행’으로 유명한 만화가 허영만, 여가와 행복이라는 주제에 주목해온 유진룡 전 문화부 장관, 우리 해군 함정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박길성 전 고려대 부총장, ‘시테크’ ‘협업으로 창조하라’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을 지낸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등이 강연자로 나선다.

또 푸르메재단 상임이사이자 ‘유럽 맥주 여행’ 저자인 백경학의 맥주 이야기, ‘술 선생’으로 불리는 이명진 양산대 관광경영학과 교수의 와인 이야기, 세계의 커피 농장과 카페를 찾아 57개국을 여행한 구대회 구대회커피 대표의 커피 이야기도 준비돼 있다.

책방 대표인 최 소장은 고려대 사회학과에서 여가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노팅엄 트렌드 대학에서 유산관광을 공부했다. 일찍부터 여가 문제에 주목해 연구소를 창립했고, ‘골목길 역사산책’이란 제목으로 여러 권의 답사 책을 냈다.

그는 서점을 열자마자 인문학 강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해 6월에 ‘사람을 말하다’에 이어 가을에 ‘한국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저자 릴레이 강연을 진행했다. 책방에서는 생활청자 전시회와 블루마운틴 사진전도 열고 있다. 최 소장은 “동네책방이 지역의 문화적 거점이 될 수 있다”면서 “인문학 강연은 지역에 문화를 공급하는 일이자 지역의 문화적 자산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인천=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