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50만원을 600만원으로 불린 ‘십시일반’의 힘

입력 2023-03-10 04:02

2014년 4월 우리 부부는 한가롭게 박타푸르를 거닐고 있었다. 네팔의 3대 고도 중 하나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처음엔 우리네 민속촌처럼 가짜로 만든 모델 하우스만 잔뜩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르바르라는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선처럼 펼쳐진 좁은 골목마다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고 있었다.

5일간 히말라야 줄기를 힘겹게 오르내린 탓에 퍽 고단한 상태였다. 중세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왕궁과 사원을 돌아다니는 동안 바닥난 체력이 다시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뭣보다 시장에 쪼그리고 앉아 채소며, 도자기며, 허름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정겨웠다. 여기저기 염소를 끌고 다니는 아이들 얼굴은 어찌나 환하던지.

누군가는 네팔을 가난하고 불결한 나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천국에서나 볼 법한 미소였다. 오래된 유산을 간직한 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 나라가 그동안 가본 어떤 문명국보다도 맘에 와 닿았다. 1년 있다가 꼭 다시 오게 해달라고, 현지인처럼 마니차를 돌리며 얼마나 빌었던가.

내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꼭 1년 후인 2015년 4월 대지진이 네팔을 강타하면서 박타푸르가 무너져 내렸다. 도시 전체는 폐허로 변했고, 사망자 수가 1만명 가까이 늘어났다. 천국의 미소가 생지옥의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손 놓고 있기가 어려웠다. 여행 내내 정이 잔뜩 들었던 셰르파와 현지 가이드들의 안부도 걱정됐다.

마침 받아뒀던 명함이 있어 안부 메일을 보냈다. 일주일 만에야 답장이 왔다. 네팔과 한국을 오가며 NGO에서 일했다는 현지 가이드 벅터씨였다. 예의가 바르면서도 차분한 행동거지에 엘리트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 역시도 지진을 피해 가지 못해 형수와 작은숙모님이 돌아가셨단다. 당장 우기가 닥쳐 텐트가 간절하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개인적으로 구호 단체를 통해 성금을 보내려다가 생각을 해보았다. 벅터씨라면 현지인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럿이 조금씩 힘을 합쳐 좀 더 큰돈을 모아 보내면 어떨까. 이른바 한 숟가락씩 열 술만 모아도 쉽게 한 그릇이 된다는 ‘십시일반’을 추진해 보고 싶었다.

평소 남에게 뭔가 부탁하는 걸 싫어하는 부부지만 이번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 운동 클럽, 대학 선후배(회사 동료들은 제외하고)에게 성금을 보내 달라고 절절한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고색창연한 박타푸르에서 염소를 끌던 아이들 사진을 첨부했다. 대신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액은 1인당 만원씩, 딱 이틀 동안만 모금한다고 알렸다.

예상외로 만원 이상 보내주신 분들이 더 많았다. 금액이 커서 혹시 잘못 보낸 게 아닌가 싶은 분들도 있었다. 부부가 네팔 가려고 400만원을 모아놨는데 다 기부하겠다는 분에겐 십시일반 취지에 어긋난다고 정중히 마다했다. 그렇게 모은 216만원에 우리 부부의 성금을 합쳐 네팔로 송금했다. 각자에겐 적은 돈이지만 그들에겐 아주 큰돈이었다.

지난달에 튀르키예를 강타한 대지진 또한 상황이 처참하긴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성금만 보내고 말려다가 8년 전 경험을 떠올렸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는 작가가 됐고, SNS를 통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1인당 커피 한 잔 가격인 5000원만 내달라고 호소했다.

목표는 500명, 목표 금액은 250만원. 거기다 내가 50만원을 더해 300만원을 낼 생각이었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일주일 후 마음을 졸이며 통장을 열어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500만원을 훌쩍 넘긴 수백 건의 송금 내역이 줄줄이 이어졌다. 내 성금을 합쳐 600만원을 주한 튀르키예대사관으로 보냈다. ‘마녀체력과 친구들’이 모은 따스한 밥 한 그릇이 작으나마 위로가 되면 좋겠다.

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