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과음한 탓에 일어나자마자 숙취에 시달렸다. 뜨겁고 시원한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이럴 때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음식이 있으니,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단골 식당으로 향한다. 따뜻한 밥뚜껑 위에 손을 얹고 대구탕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비린 맛을 잡는 데 미나리만한 게 있을까. 담백하고 포실한 대구 살을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먹는 맛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부드러운 미나리의 식감을 즐기고 싶다. 미나리야말로 봄철 입맛을 돋우는 채소다.
어릴 적 살았던 동네에 습지가 있었는데 물미나리가 잘 자랐다. 아버지가 미나리를 베어 자전거 짐칸에 싣고 오는 날, 저녁 메뉴는 동태찌개였다. 나는 샘터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가 미나리를 다듬는 걸 거들었다. 미나리가 피를 맑게 해준다고, 생으로 먹어도 된다고 알려주셨다. 어머니가 연한 잎을 따서 내 입에 넣어줬다. 쌉싸래한 향이 확 퍼졌다.
어머니의 동작은 크고 활달했다. 미나리 밑동을 자르고, 고무 함지에 물을 콸콸 받았다. 어머니가 부엌에 가서 식초랑 놋수저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놋수저가 왜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놋수저가 거머리를 잡는다고 하셨다. 놋수저를 넣은 식초 물에 미나리를 살살 흩트린 다음 억센 줄기를 뚝뚝 뜯었다. 비스듬히 세운 대나무 채반에 깨끗이 씻은 미나리 한 단. 기억은 요술 부리기 좋아해서, 빛바랜 시간도 수채화처럼 산뜻하게 채색해내고야 만다. 과거를 소환해 현재의 장면으로 또렷이 현상하는 것도 기억이 주는 선물일까.
거품을 걷어가며 대구탕이 한소끔 끓어오르면 불을 줄인다. 살짝 익힌 미나리를 먼저 건져 먹는다. 콧등에 솟는 땀을 찍어가며 대구 살을 발라 먹다 보면 어느새 그릇 바닥이 보인다. 속이 개운하게 풀린다. 든든한 속으로 식당을 나서면 겨우내 묵혀둔 걱정거리도 조금 가벼워진 듯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집으로 향한다. 봄기운이 완연히 번지지 않아 코끝에 닿는 바람이 차지만 머잖아 봄꽃들이 다투어 필 것이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