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 못 견디면 살아남겠나”… 도제식 교육에 성폭력 일쑤

입력 2023-03-09 04:06
국민일보DB

반려견 훈련사 A씨는 지난해 11월 훈련소장 B씨를 유사강간과 강제추행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2019년 3월 두 사람은 훈련을 위해 함께 지방에 내려가 훈련장 인근 숙박업소에 머물렀다. A씨는 고소장에서 “B씨가 선배로서 (훈련) 팁을 주겠다면서 본인의 방으로 데려갔다”며 “그런데 갑자기 옆자리에 앉더니 뒤에서 껴안고 유사강간과 강제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A씨는 “너무 놀라 그대로 뛰쳐나왔다. 당시엔 고소하지 못했다. 동종 업계 선배이자 나이가 스무 살 이상 많은 B씨가 보복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A씨가 경찰에 제출한 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사건 이튿날 A씨는 B씨에게 “사과를 한다고 해도 받을 생각 없다. 서로 없었던 사람처럼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B씨는 “그래 그럼”이라고 답했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지난 1월 B씨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 관계자는 8일 “시일이 지난 사건임에도 피해자 진술이 구체적이고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 등 정황 증거를 토대로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B씨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A씨가) 날짜도 틀릴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추행은 전혀 없었다. 통화 내용은 같은 방에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 않았던 거였다”고 반박했다. 그는 “지난해 A씨가 훈련사 단체에서 활동을 못 하게 되자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고소한 것으로 보인다. 명예훼손과 무고로 고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명 반려견 훈련사 이찬종씨의 성희롱 피소 보도(국민일보 2월 20일자 12면 참고) 이후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다른 훈련사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 사실을 전한 여성들은 폐쇄적인 업계 구조 탓이 크다고 주장했다.

여성 훈련사는 남성 위주인 업계에서 성희롱이나 폭언을 들어도 참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애교 부려봐라’ ‘가슴밖에 볼 게 없다’ 등의 말을 듣는 게 일상이라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미성년자 때 ‘산삼보다 좋은 고3’이라는 말도 들었다. 농담으로 못 받아들이자 ‘이 정도도 못 견디는데 이쪽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얘기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훈련사들이 도제식 관계로 얽혀 있다 보니 피해를 입어도 쉬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졸업하더라도 훈련사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소 견습생부터 일을 시작하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다. C씨는 “훈련사 업계는 판이 좁고 인맥이 중요한 곳”이라며 “소속 소장과 앙숙 관계가 되면 (소장이) 업계에 안 좋은 소문을 내서 아예 짓밟아버린다. 그래서 함부로 피해를 당했다고 털어놓을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훈련소 상사들이 훈련사 단체 심사위원으로 있는 경우가 많아 대회 출전이나 자격증 취득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침묵하게 된다는 말도 했다.

여성 훈련사로 일했던 D씨는 업계에 회의감을 느껴 몇 년 전 일을 관뒀다. 그는 “하늘 같은 스승을 감히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며 “소장들이 가장 쉽고 빠르게 분을 풀 수 있는 곳이 밑에 있는 훈련사들이다”고 말했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윗사람의 평가나 고용이 다른 업계보다 영향이 큰 분야인 경우 권력관계가 한쪽에 쏠릴 수밖에 없다”며 “한쪽이 영향력을 많이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일수록 성폭력이 많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정신영 기자 spiri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