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성공에 미친 ‘돈시오패스(돈과 소시오패스의 합성어)’라 불리는 여자.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서 동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선배들에겐 견제 대상이다. 정글 같은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과 술에 의존하며 몸을 갈아 넣는다. 오죽하면 친구가 “너 자신을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냐”고 잔소리한다.
지난달 26일 종영한 JTBC 드라마 ‘대행사’에서 배우 이보영은 워커홀릭이자 권력 지향적인 인물인 고아인역을 맡았다. VC기획이란 광고회사에서 고아인은 상무로 승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승진 후에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직원들은 그에게 소모품일 뿐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고아인도 동료의 소중함을 깨닫고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간다.
20년차 배우인 이보영도 오피스물은 처음이었다.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사내 암투극’이 생소하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조직 생활을 해보진 않았지만 모두가 속으로만 생각하는 말을 아인이처럼 입 밖으로 내뱉는 게 재밌었다”면서 “보는 사람이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아인이 퇴사를 고민하던 후배에게 “일이 힘들면 월급을 올려달라고 해야지. 왜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리를 해”라고 말하던 장면은 직장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다.
오피스물이긴 하지만 고아인은 비현실적 인물이다. 실제 사회에선 고아인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기 어렵다. 이보영도 “현실에 이런 사람은 없잖아요”라며 웃었다. “‘대행사’는 아인이라는 캐릭터가 성장해서 나은 사람이 돼가는 성장 드라마에요. 비록 미운 말을 하지만 보는 사람들이 그의 성장을 응원할 수밖에 없게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간접적으로 회사생활을 해 본 이보영은 “회사가 이렇게 정치적일 몰랐다”며 놀라 했다. 어려운 순간이 와도 금방 털고 일어나 극복해가는 고아인을 연기하면서 이보영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게 사회생활이지’라고 생각하며 몰입했다.
“(아인이를 보면서) 신인 시절 생각이 났어요. 그때 저도 ‘사회생활은 다 힘드니까 잘 버티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신인 때는 현장에 가는 게 무서웠어요. 도망가고 싶고, 내 길이 아닌 것만 같았죠.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 일을 제가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만든 캐릭터를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면 거기서 오는 기쁨이 컸어요.”
그가 연기에 재미를 붙인 건 드라마 ‘적도의 남자’ 때부터였다. 이보영은 “그전에는 내가 캐릭터에 대해 의견을 내면 현장에서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김용수 감독님은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처음으로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2002년 데뷔한 이보영은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마더’ ‘마인’ 등을 히트시켰다. “예전에는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작품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요즘엔 여성 서사 작품이 많아져서 감사해요. 다음에는 좀 더 밝은 역할로 돌아오고 싶어요.”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