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볼 수 있어 인정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증거가 필요하기에 어렵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과학적인 증거가 무색한 영역도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의 영역입니다.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세계는 너무 커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인간 능력으로 감히 측정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체가 우리 눈앞에 있지만,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작렬하는 태양을 계속 볼 수 없음에도 태양은 엄연히 존재하듯,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거룩함과 영광의 빛으로 명백히 존재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히브리어 ‘첼렘’인데 ‘그림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그림자’로 만드셨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체가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림자를 증명하기 위해 빛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빛나는 영광의 빛으로 자신의 세계를 비춰 이 땅에 상으로 맺으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상으로 만드신 그림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성도라는 그림자를 통해 빛이신 주님의 존재와 그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많은 사람이 성도라는 그림자를 보고도 하나님의 세계를 부정합니다. 아마도 세상의 눈에 비친 성도의 삶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빛의 문제도, 실체의 문제도 아닌 그림자의 문제는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림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합리적인 의심은 성도가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살기를 거부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림자로서 살아가기보다 자신이 실체요 주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류였던 아담이 그랬습니다. 그는 빛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것이 인류가 기억하는 아담의 업적이 됐고 그 업적으로 그는 죄인이라는 이름을 남겼습니다.
아담이 한 일과 그의 이름에서는 하나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만나 회색으로 있을 수 없기에 어둠과 빛이 겹치는 흔적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림자인 성도가 실체인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주체로 살아가려는 모습에서, 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세계와 그분의 빛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둠은 어둠이고 빛은 빛입니다.
둘이 만나 회색이 될 수 없지만 어둠이 빛으로 덮이면 어둠의 흔적은 사라집니다. 성도가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온전히 덮인다면, 세상이 하나님의 그림자로 맺힌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김영빈 목사(전주 예수닮은교회)
◇예수닮은교회는 말씀과 삶이 하나가 되고 삶이 예배와 선교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유튜브를 통해 말씀을 나누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애쓰고 있습니다. 20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서 가족처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 재정의 50%를 선교에 사용하는 알찬 교회입니다.
●이 설교는 장애인을 위해 사회적 기업 ‘샤프에스이’ 소속 지적 장애인 4명이 필자의 원고를 쉽게 고쳐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