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결함 개인이 입증?… ‘발랙박스’ 달아야할 판

입력 2023-03-11 04:04

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의 한 도로에서 60대 할머니 A씨가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엔진이 갑자기 날카로운 굉음을 일으켰다.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할머니는 “어, 어” 하며 당황해 했다. 차량이 앞차를 들이받고 급가속하자 곧바로 “아이고 이게 왜 안 돼. 큰일 났다”며 함께 탄 손자 이름을 수차례 다급하게 불렀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듯 둔탁한 소리도 들렸다. 차량은 왕복 4차로 도로를 넘어 지하 통로에 추락한 후에야 멈췄다. 할머니는 크게 다쳤고 12살 된 손자는 숨졌다. 8년 넘게 차량으로 아이들 등·하원을 도맡았던 할머니는 형사 입건됐다.

숨진 아이의 아빠이자 A씨 아들 이모씨는 지난달 23일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차량 결함 입증 책임을 자동차 제조사가 지도록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회 국민동의 청원을 올렸다. 그는 지난 1월 제조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도 냈다. 이씨는 청원에서 “아들이 왜 하늘나라에 갈 수밖에 없었는지 규명해야겠단 생각에 주변 만류에도 소송을 냈다”며 “비전문가인 유가족이 급발진을 증명해야 하는 답답한 현실에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A씨 청원은 국민 5만명 동의 요건을 충족해 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수 있게 됐다. 여야 모두 제도 개선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습이다.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은 “할머니 운전습관 등을 고려할 때 비정상적 가속을 했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며 “실체 규명과 제도 개선에 힘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리콜센터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사고는 최근 6년간 201건이나 되지만 차량 결함 인정 사례는 ‘0건’이다. 차량 제조사는 급발진이 페달 조작 미숙이나 차량 매트가 페달에 끼이면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운전자 책임이란 얘기다. 이에 급발진 의심사고 당사자들은 개인이 차량 결함을 입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소비자들 사이에선 “차량에 ‘발’랙박스(페달의 발 부분을 찍는 블랙박스)라도 달아야 할 판”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내 급발진 의심 사고 관련 민사소송에서도 승소 확정 사례는 0건이다. 소송 진행 시 각종 차량 감정 비용에 최대 수천만원까지 들고 긴 시간이 소요돼 변호사 업계에선 “급발진 소송은 수억원 수임료를 줘도 맡기 힘들다”는 말도 나온다.

유일한 항소심 승소 사례인 2018년 BMW 급발진 의심 사고의 경우 여전히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다. 유가족 측은 급발진 사고 발생 전 BMW코리아를 통해 차량 점검을 받았고, 사고 당시 비상등을 켠 상태로 갓길 주행하는 등 비상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유가족 2명에게 각 4000만원을 지급하라”며 1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사건 대리인 이인걸 법무법인 다전 변호사는 “자동차 결함 외엔 사고 원인이 없다는 점을 입증해서 승소할 수 있었는데, 차량의 구조적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따졌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밀한 기술적 부분은 제조사만 정확히 알고 있어서 아무리 전문가가 입증해도 반박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2016년 8월 부산에서 물놀이를 가던 일가족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부산 싼타페 사고’의 경우 급발진이 인정되지 않았다. 1심 법원은 6년여간의 심리 끝에 지난해 1월 원고 패소 판결했다. 유족들은 사고 차량에 남은 부품 등을 결합해 진행한 ‘전문가 급발진 모의실험 결과’에서 급발진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영상 촬영 당시 나타난 현상(급발진)이 사고 당시와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급발진 발생 원인 중 하나로 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 오류 가능성을 꼽는다. ECU 오류로 급가속이 발생하고 사고기록장치(EDR)에 운전자가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 페달을 100% 밟은 것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급발진 사고들을 보면 가속 시간이 2~3초 내로 끝나지 않는다. 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도 1분 동안 100% 가속 페달을 밟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전자제어 장치 소프트웨어에 오류가 나면 휴대전화나 컴퓨터에 오류가 났을 때처럼 다시 켜진 후 오류 흔적이 남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전문가 박병일 명장은 “기업들이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등 결정적 쟁점에서 불리할 것 같으면 기업 비밀이라며 자료를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강릉 급발진 소송을 대리하는 하종선 법률사무소 나루 대표변호사는 “입증 책임이 원고에게 있는 상황에선 소극적으로 보는 재판부가 많을 수밖에 없다”며 “기술력·경제력 차이 등을 고려할 때 제조사가 입증 책임을 지도록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미식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증거개시절차라고도 불리는 이 제도는 재판 전 원·피고가 모든 증거 자료를 교환하는 절차다. 박병일 명장은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이 자료를 반드시 제출해야 해 정보 약자인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