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다가오면서 금융지주 회장의 ‘황제 연임’ 관행을 가능케 했던 ‘허수아비 이사회’ 기능이 개선될지 관심이 쏠린다. 금융지주 회장들이 10년에 이르는 장기집권을 하면서도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소홀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커진 탓이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회장 등 최고경영자(CEO) 선임 절차를 중심으로 이사회 운영방식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만년 회장 관행에 급브레이크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5대 시중은행을 자회사로 둔 금융지주 회장 가운데 자리를 가장 오래 지키고 있는 사람은 윤종규 KB금융 회장이다. 2014년 11월 취임한 윤 회장은 2017년과 2020년 두 차례 임기를 연장하는 데 성공해 현재 10년째 회장직을 지키고 있다. KB금융 사상 첫 3연임 사례다. 윤 회장은 2014년 1조4200억원에 불과했던 KB금융그룹의 연간 당기순이익을 지난해 4조4100억원으로 3배 이상 키우고 KB손해보험(옛 LIG손해보험), KB증권(옛 현대증권), KB라이프생명(옛 푸르덴셜생명) 등 굵직한 비은행 계열사 인수·합병(M&A)에 성공해 전열도 갖추는 등 성과를 냈다. 당초 금융권에서는 “윤 회장이 오는 11월 임기 만료 때 무난히 연임에 성공해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2012~2022년)의 재임 기록을 꺾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회에서 금융지주 회장의 초장기 집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 일부는 금융지주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와 사외이사제 관련 개선 방안을 직접 논의했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해외 입법례까지 살피며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을 저지할 방안을 살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금융 당국이다. 지난 1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금융위원회와 금감원은 은행권 내부 통제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지배구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국내 실태와 외국 법·제도 등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특히 시장 관심이 큰 금융지주 CEO 선임 절차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 금융 당국의 압박을 전후로 임기 만료를 앞둔 금융지주 회장이 줄줄이 퇴진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NH농협금융 임추위는 김용환 회장을 연임시키는 대신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을 차기 수장으로 낙점했다. 연임할 것이 유력했던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은 세대교체를 선언한 뒤 차기 수장 후보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우리금융 초대 수장인 손태승 회장도 연임을 포기했다.
결과적으로는 황제 연임 관행이 깨졌지만 그 과정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금융권에서 가장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춘 금융지주사마저도 지배구조만큼은 주먹구구식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CEO 후보 관리 방식부터 손봐야
학계에서 가장 시급한 것으로 꼽는 것은 CEO 선임 절차 개선이다. 현재 금융지주 임추위 대부분은 내부 주요 임원에 외부 금융권 전문가를 더해 10명 이상의 롱리스트(long list)를 사실상 형식적으로 관리하다 CEO 교체 시기가 되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최후의 1인’을 선정한다. 임추위를 구성하는 사외이사가 롱리스트 후보에 대해 인터넷에 공개된 수준 이상의 정보를 얻기도 어렵다. 또 CEO 선정 과정이 깜깜이로,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정당성을 얻기도 쉽지 않다. 앞서 손 회장이 갑작스레 연임을 포기한 탓에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우리금융 임추위는 차기 회장 후보 롱리스트를 채우기 위해 헤드헌터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때문에 CEO 후보 관리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찍이 후보군을 3~5명으로 줄여 쇼트리스트(short list)를 만들고 이들에 대한 검증 기회를 늘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후보의 일상적인 업무 능력부터 소통 방식, 성품 등을 장기적으로 깊이 있게 검증해야 우수한 CEO를 선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은행에서 발생했던 700억원대 횡령이나 은행권 전반의 불법 외환송금 등 각종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각 후보에게 해결책을 물어 위기 대처 능력을 파악하는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사회가 일부 후보와 결탁해 독립성을 잃는 상황을 방지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 사법부가 운영하는 배심원제를 참고해 사외이사들이 익명의 비공개회의를 정기적으로 여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미국 배심원은 여러 차례 재판을 통해 충분한 정보를 습득한 뒤 최종판결 전 비공개회의를 진행한다. 이때 모인 배심원은 각자 익명으로 의견을 낸 뒤 하나의 의견을 도출해 재판부에 제출한다. 외부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합리적 의견을 최대한 공정하게 끌어낼 수 있는 배심원제 장점을 CEO 선정 과정에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우진 금융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한국의 금융지주사는 자산이나 순익 규모 측면에서 크게 성장했지만 거수기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는 이사회 운영 등 지배구조 문제로 공격받고 있다”면서 “CEO에게 도전할 수 있는 독립성을 갖춘 ‘일하는 이사회’를 구축하려면 회장 선임 절차 개선과 사외이사만의 비공개회의 개최 의무화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