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했다. 식민지 조선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한갓 음료였던 커피도 전쟁의 광풍을 피하기 어려웠다. 편안하게 커피 한잔 마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수입품인 커피의 부족이 일차적 원인이었지만, 커피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더 큰 문제였다.
커피를 즐기던 조선의 문화예술인 중에 커피를 서양풍이라고 하여 갑자기 매도하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동양 음료인 차를 마시는 것은 괜찮지만, 서양 음료인 커피를 마시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갑자기 커피가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 됐다. 당시 사람들 중 커피가 차와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탄생한 음료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커피를 좋아했던 영화감독 안석영(본명은 석주)이 갑자기 커피 매도에 앞장섰다. 안석영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의 삽화를 그리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꽤 존경받던 영화감독이며 화가였다. 홍명희의 연재소설 ‘임꺽정’의 삽화에 참여했고, ‘심청전’이란 영화를 제작한 유명인이었다. 훗날 해방이 되고 분단이 가시화되던 1949년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로 시작하는 노래를 작사해 국민 동요로 만든 바로 그 인물이다.
안석영은 매일신보 1942년 1월 19일자에 발표한 글에서 “대동아전쟁의 한가운데서 우리 국민에게 ‘유한’이란 두 글자는 아주 말살해 버려야 할 것”이며, 커피를 마시는 것은 “유한한 풍경”이기에 “보기에 미안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커피를 마시되 적당한 때와 장소를 찾아서 적당한 절차를 지켜서” 마실 것을 요구했다. 그가 말하는 ‘적당한 때’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구체적으로 ‘오전’을 피해야 할 커피 시간으로 지목했다. 오전에 커피를 마시는 젊은이들을 그는 “오전 커피-당”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오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왜 비난받아야 했을까. 그에게 오전은 열심히 근로해 국가에 봉사하는 시간이었다. 시국은 근로를 부르는데 오전부터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아마도 그의 눈에는 서양인들이 즐기는 모닝커피 풍습을 따라 하는 것조차 양풍 배격을 외치는 일제의 주장을 거스르는 미안스러운 일로 보였을 것이다. 적당한 시각에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생활의 위안과 피로 회복을 위해 “해롭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주장도 폈다. 적당한 시각이 언제인지는 물론 밝히지 않았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적당한 절차에 대해서도 그는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안석영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적당한 시각에 적당한 절차에 따라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자신의 기준이 애국이고 다른 사람의 기준이 매국이라고 단언하는 엘리트들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대부분 상식에서 어긋나는 기준이어서 지키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문제였고 비극이었다. 일제가 벌인 전쟁 광풍 속에 커피가 사라지면서 존경받던 조선인도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길상(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교육학과) leegs@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