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주의 촌철生인] 당신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입력 2023-03-08 04:05

2006년 말 독특한 제품명과 광고기법을 앞세운 브랜드가 등장했다. 바나나과즙이 함유된 저지방 가공유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라는 이름부터 놀라웠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그다음은 물론 ‘바나나는 길어’로 이어지지만, 처음 세상의 온갖 색을 익히기 시작한 유년부터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바나나가 하얗다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짜 그렇잖아!

주어와 부사, 서술어로 이뤄진 이 짧은 문장의 핵심어는 ‘바나나’도 ‘하얗다’도 아니다. 제품의 정체성을 단숨에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이 문장의 핵심어는 ‘원래’라는 부사다. 도대체 누가 좋은 글을 쓰려면 부사와 형용사 사용을 줄이고 가능하면 주어와 서술어로만 된 문장을 쓰라고 가르치는가? 이 네이밍의 신통방통한 절묘함은 ‘원래’라는 부사에서 나온다. ‘바나나는 하얗다’가 아니라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이기에 사람들은 원래의 바나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1974년 출시된 장수 브랜드가 여전히 ‘넘사벽’으로 군림하는 시장에서 후발주자의 도전은 담대했다. 획기적인 네이밍으로 출시와 동시에 1등 브랜드를 걸고넘어지면서도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 몰래카메라 방식의 유머광고로 진지한 대결을 비껴나 살짝 눙치는 기법을 택했다. 한마디로 치고 빠지기를 했다. 소비자들은 그 한 방을 신선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바나나가 원래 하얗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제품이 팔리지 않는다고 호통치는 마케팅 본부장, 원래 먹는 속 부분은 하얗지 않으냐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후회 안한다고 쩔쩔매며 대답하는 제품 개발자 백부장, 이 둘의 대화로 이뤄진 광고는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광고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새로 나온 바나나우유는 이전 제품과 달리 바나나과즙을 넣을 수 있었다(기존 바나나맛 우유도 지금은 소량의 바나나과즙이 들어 있다). 70년대와 달리 바나나가 저렴한 과일로 신분 하강을 한 덕분이다. 마침 웰빙 시대를 맞아 무색소 식품을 원하는 사회 분위기에도 딱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정색을 하고 달려드는 진지한 도전자보다는 자기비하의 농담까지 할 줄 아는 능청스러운 신제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시대가 된 거였다. 기존 바나나맛 우유의 충실한 소비자였던 나는 이 시장에 역전패가 기록될 것인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시장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소비자들이 늘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덕분에 광고인들은 매번 새로운 고민에 부딪히곤 한다. ‘원래’라는 말은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 매우 요긴한 단어다. 하지만 일단 한 번 머리에 새겨진 인식은 ‘원래’보다 강하다. 광고는 사실이 아니라 인식의 싸움이니까. advertising의 라틴어 어원은 ‘주의를 돌리다, 마음을 무언가에 향하게 하다’라는 의미다. 일본에서 온 한자어이긴 해도 광고나 홍보라는 말은 ‘널리 알리다’라는 뜻이다. 즉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고 마음을 향하도록 널리 알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넓은 의미의 광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광고와 홍보, 마케팅의 경계가 사라지고, 프레임이라는 말이 일반화된 요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프레임도 결국은 의도한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 아닌가.

한 치 쇠붙이로 사람을 죽인다는 ‘촌철살인’은 광고카피를 표현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단 한 줄의 카피가 브랜드를 살리기도 하고, 오히려 브랜드를 위협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브랜드만의 일이 아니다. 정치인의 말 한마디가 국가와 국민을 살릴 수도 있고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정책 패러다임이나 구호 역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잡념을 떨치고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뜻의 활인검(活人劍)이 있듯이, 이왕이면 촌철살인에 앞서 촌철생인을 말하고 싶은 이유다. ‘원래’ 카피라이터는 그런 직업이어야 한다.

최현주(카피라이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