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한 피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1542~1587)는 백만 군사보다 존 낙스(John Knox·1514~1572)의 기도가 더 무섭다고 토설했다. 당시 영적 간음으로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 종교개혁을 향한 담대한 용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불사한 그의 기도였다.
기도는 곧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이 은혜의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 문을 여는 일이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선 반드시 살아계신 주님과의 인격적 교제와 함께 그 분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단호히 던져버려야 한다.
엘리야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땅이 우상숭배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기도한 즉 제단 위 불이 떨어진 것과 또한 흉년이 든 때에 큰 비를 내리게 한 사건은 그 자신이 여호와께 인정받는 신실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가뭄이 선포된 지 삼 년째 되는 해 하나님께서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이스라엘에 다시 비를 내리시기 위해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신다. 조금 전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과의 마지막 단판승부를 벌였다. 대승한 그는 우상숭배자들을 기손 강가로 끌고 가 모두 처형했다. 아합은 자신의 추종자들이 살육되는 현장을 목도했다. 사실 그도 자기가 엘리야에게 행했던 모욕과 저주를 돌이키면서 전전긍긍했는데 의외로 선지자는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왕상 18:41)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한마디로 ‘아직 당신을 처단할 때는 아니라’는 뜻이다.
아합이 누구인가. 성경은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중략)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심히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31~33)고 기록한다. 마침내 큰 비의 소리가 있다고 말한 엘리야는 자연적 현상이 아닌, 믿음으로 반가운 빗소리를 들었다. 그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이미 그 말씀이 주어졌다.(왕상 17:14)
종일 금식한 아합은 자신의 거처에서 베푸는 흥겨운 잔치에만 관심을 쏟았다. 약 3년 6개월 동안 기근과 흉년 이후 왕이 이제 비가 올 것임을 안 이상, 하늘의 주재자에게 감사의 제단을 쌓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아무런 실존적 고뇌가 없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에 반해 엘리야는 기도하기 위해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하나님께서 비를 약속하셨지만 그는 간절히 간구해야만 했다. 그는 아마도 지난날 불로 응답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이젠 물로 응답해 주시길 열렬히 기도했을 것이다. 마치 하박국 선지자처럼 자신의 파수대 위에, 성루 위에 서서 그 분의 응답이 있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기록한 대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는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이정미 박사
약력=숙명여대 인문대학원(문학박사), 성결대 신학대학원, 전 목원대, 인천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