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실리주의 통상 외교 펼 것… 韓 ‘전략적 모호성’ 도움 안돼”

입력 2023-03-07 04:07
정하늘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가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 대표는 최근 국제 통상 분야의 변화와 관련해 “미국의 패권 위에서 지탱되던 국제질서, 그 축 중 하나인 자유무역주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권현구 기자

국제변호사인 정하늘(43)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통상 분쟁 전문가다. 지난해 5월까지만 해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 통상분쟁대응과장을 역임하며 굵직한 현안을 다뤘다. 그가 해결한 대표적인 분쟁으로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기했던 한국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해제 소송이 꼽힌다.

이 사건을 포함해 여러 분쟁을 승소로 이끈 주역인 정 대표에게 현 국제통상 시장을 물어보니 일촉즉발의 전쟁터라고 답했다. 외교통상을 무기로 삼아 미·중 간에 단거리 싸움에 돌입했다는 게 정 대표의 인식이다. 지난 2일 서울 압구정동 공유오피스에서 만난 정 대표는 “미국은 이제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패권국이 아닌 세계 최강대국 입장에서 자국 실리를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핵심 수단으로 꼽은 것은 ‘산업의 쌀’인 반도체다. 한국이 양국 사이에 낀 형국 관련, 그는 “더 이상 ‘전략적 모호성’은 의미가 없다. 한국이 어떤 편인지 의심하지 않도록 포지션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미국에 신뢰를 구축하되 품목별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기술력을 꼽았다. 정 대표는 “미국 정부가 포드사와 중국 배터리 업체 CATL 간 전략적 협력을 용인하는 것은 CATL이 가진 기술력 때문”이라며 “결국 기술이 앞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를 그만두고 통상 공무원이 돼 후쿠시마 건 승소를 이끌었다.

“세종시로 처음 출근한 날, 책상에 스위스 제네바행 비행기표가 있었다. 지금인 고인이 된 이용환 전 국장님이 임관했다고 인사를 하자 ‘시간 보내지 말고 제네바가서 후쿠시마 수산물 사건을 고민해보라’고 하셨다. 그게 많은 도움이 됐던 기억이 난다.”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 통상 질서가 급변하고 있다. 전문가로서 어떻게 보나.

“미국의 패권 위에서 지탱되고 있던 국제질서, 그 축 중 하나인 자유무역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이제 통상은 산업정책·외교안보와 결합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통상 정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를 승계했다. 기존 자유무역체제를 유지하는 게 미국에 더 이상 득이 되지 않는다는 대내외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의 급부상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이 없었더라도 미국 입장이 지금과 같을까라고 본다면 아닐 거 같다. 미국은 이제 패권국이 아닌 세계 최강대국 입장에서 실리를 추구할 것이다. 앞으로는 다른 강대국들과 유사한 셈법을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

-미중 갈등은 격화될 것으로 보나.

“피터 자이한과 같은 미국 지정학적 분석가는 중국이 5~10년 안에 경제적으로 붕괴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펀더멘탈 면에서 우세하기 때문이다. 다만 변수는 기술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단기로든 장기로든 반도체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기술이 반도체와 연계가 된다. 미국이 대중 반도체 통제에 진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도체 관련 최근 미국이 대중 수출 규제 조치를 취하면서 한국도 피해를 보게 됐다.

“반도체 지원법과 가드레일(안전장치)은 대중 압박의 일부다. 그 동안 한국이 균형 외교라는 표현도 쓰고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표현도 썼는데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 지금은 줄다리기하기엔 너무 위험한 상황이다. 미국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가치에 대해서는 존중하면서 한국이 어떤 편인지 포지션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명확하게 미국 편을 드는 경우 중국 경제 보복을 받을 우려가 있다.

“이는 품목에 따라 다를 거 같다. 한국이 미국과의 신뢰를 구축하되 유연성 있게 대응해야 한다. 기술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포드사와 중국 배터리 업체 CATL 간 전략적 협력을 용인하는 것은 CATL이 가진 기술력 때문이다. 결국 기술력이 앞서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얻을 것도 얻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이 양자 컴퓨터용 반도체 공동 개발하는 것이나 호주가 핵잠수함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들이 단적인 예다.”

-미중 갈등이 지속되는 한 향후 이런 분쟁들이 더 늘어날 것 같다.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하나.

“다시 말하지만 기술에 유리한 측면이 있으면 진영 논리도 뚫을 수 있고 예외나 특혜도 받을 수 있다. 이제는 뉴 노멀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원 팀’이 돼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다만 과거 정부 주도와는 다르게 기업이 선봉장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각 산업별 상시 소통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정부 차원에서 일종의 콘트롤 타워를 만들고 가동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술 연구개발을 지원할 수 있도록 국회에 계류돼 있는 법들도 빨리 통과할 수 있어야겠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국제사회에서 법질서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건지 연구하고 싶은 생각이 크다. 미국이 세계 경찰을 자처하면서 세계에 공권력이란 게 생겼다. 하지만 이 역할이 없어지면 다시 공백으로 이어진다. 이는 다극체제로 넘어가는 요인이 되고 법 질서라는 게 국제사회에서 의미가 없는 일이 돼버릴 수도 있다. 정말 의미가 없는 건지, 이 부분을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싶다.”

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