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래’ 선택한 한국… 일본은 우리에게 새로운 빚을 졌다

입력 2023-03-07 04:01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일제 강제동원 문제를 둘러싸고 장기간 계속돼온 한·일 관계의 교착 상태를 풀기 위해 정부가 해법을 꺼냈다. 제3자 대위변제 방식을 통해 국내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판결된 배상금을 지급키로 했다. 일본은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한·일 미래청년기금’(가칭)에 출자하고, 식민 지배의 통렬한 사죄를 밝힌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계승을 정부 차원에서 표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직접 배상과 직접 사죄를 원했던 피해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문재인정부에서 해법으로 거론됐던 ‘1+1 방안’(한·일 기업 출연금 활용)이나 ‘문희상안’(한·일 기업·정부·국민이 기금 조성)의 변형에 그쳤다. 피해자 단체는 즉각 반발했고, 사전 협의를 진행해온 정부도 그 기류를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택한 것이다. 지난 5년간 사실상 방치한 한·일 관계를 이 시점에 복원하는 것이 급변하는 경제·안보 정세 속에서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봤다.

정부가 조급했다는 지적이 있다. 관계 개선에 의지를 보이다 보니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일본에 성의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흐름이 보였다. 일본은 좀체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가해기업의 직접적인 기금 출연을 회피했고, 과거사 입장 표명도 역대 정부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선에 머물렀다. 책임 회피와 역사 왜곡을 일삼아온 비겁한 행태가 그리 나아지지 않았는데, 이런 타협안을 꺼낸 것이 성급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일 관계는 우리의 미래 먹거리와 미래 안보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양국 합의에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했을 만큼, 급변하는 국제 경제 질서, 동북아 지정학 향배, 갈수록 고조되는 북핵 위협 대응과 직결돼 있었다. 강제동원 피해의 온전한 회복과 미래지향적 국익의 확보 사이에서 이 정부는 ‘미래’를 택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치적으로 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반일 정서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며 양국 관계를 방치했던 지난 정부의 선택은 차라리 쉬운 쪽이었다. 피해자 단체의 반발부터 야당의 거친 공세와 여론 악화의 부담까지 산적한 난관에도 한·일 관계 개선을 택해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평가는 향후 전개 과정을 지켜보며 내려지게 될 것이다. 특히 일본은 한국 정부의 대승적 결단에 외교적 ‘빚’을 진 상황이 됐다. 강제동원 피해 회복을 위한 후속조치와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