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의 신앙으로 세상 읽기] 애통할 줄 아는 어른이 필요하다

입력 2023-03-07 03:02

지난달 18일 한 일간지에 ‘어른의 정치’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내용을 읽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현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 그리고 미래를 걱정하는 글이다. ‘어른이 없다!’ 이 말은 정치계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교단이나 교회 내에 분쟁이나 여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조율해 줄 사람이 없기에 해결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고 한다. ‘어른’이라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데 이런 역할을 할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앞서 말한 칼럼에는 이돈희 전 교육부 장관이 최근 한 포럼에서 토로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었다.

“선생으로서 두 가지를 가르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나는 입법, 즉 룰 만드는 훈련을 시키지 못했다. 세상엔 다양한 견해가 있으므로 서로를 존중하고 타협해 가며 룰 만드는 훈련을 시켜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오늘날의 여의도를 낳았다. 다음으로 준법하는 훈련을 시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서로를 이기려고만 하는 경쟁 사회를 만들었다.”

어른으로서 갖는 아쉬움은 무엇일까. 어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스스로 오류가 없다는 독선적 강요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고 독선적일 수 있다는 자각 아래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며 최적의 해법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목사로서 만나교회 사역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은 교회 슬로건을 결정한 후 마음이 흐뭇했던 적이 있다.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누구나 교회 주변을 걷다 보면 교회 외벽에 적힌 이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슬로건을 통해 이렇게 느끼기를 바랐다. ‘그래, 교회에는 소망이 있어! 교회에 오면 문제가 해결되고 갈등을 치유할 수 있어!’ 이런 슬로건을 정한 것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 ‘복’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지만 말씀을 살아내려고 힘쓰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지만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할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조율하는 어른 노릇을 하는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은 어느 진영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판단과 정죄’의 능력은 있어도 다름을 해결하는 ‘조정 능력’은 상실했다는 의미다. 세상을 움직이고 소망을 주는 힘은 자신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조정하는 능력, 그렇게 다름에도 함께 살아가고 어울리고 용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서부터 나온다.

이것이 어른의 힘이다. 어른은 세상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애통’한다. ‘애통’은 크리스천이 슬퍼하는 방식이다. 목사이면서 작가인 마크 브로갑은 ‘짙은 구름, 더 깊은 긍휼’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통은 냉혹한 현실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라는 두 기둥 사이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애통은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정죄하거나 불평한다. ‘애통’은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오는 믿음의 행위다. 불평과 비난은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를 가지고 애통하는 것은 아주 어른스러운 기독교적 방법이다. 우리는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얼마든지 비판하고 분노하고 불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감정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검증되지 않으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고 만다. 이 세상에 대한 분노가 하나님 앞에서 ‘애통’이 될 때 우리는 믿음의 세계에 닿을 수 있다. 이때 교회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