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영원한 모름

입력 2023-03-06 04:03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영혼에 관하여’의 1장 ‘영혼에 관한 탐구의 학문적 위상, 이 탐구의 어려움’에서 “우리는 앎을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간주하되, 엄밀성의 측면에서… 어떤 앎을 다른 앎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간주하는 만큼… 우리는 영혼에 관한 연구를 높은 위치에 합당하게 놓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른바 ‘영혼’이라는, 과학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대상에 대한 연구의 학문적 당위를 설명하기 위해 운을 뗀 서두다. 이 책은 영혼 자체에 대한 묘사보다는 이론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의내리고자 하기에 약 24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독자 역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재미있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앎을 다른 앎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앎을 다른 앎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여길까. 이를테면 신이나 영혼에 대해 아는 것을, 우리가 설거지에 대해 아는 것보다 아름답거나 고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술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왜 만화에 대해 많이 아는 것보다 더 고귀한 일로 취급되는 것일까. 배움이 순수한 기쁨의 영역이라면 여러 종류의 앎 사이 위계는 사실 무용한 것 아닐까. 앎과 모름의 경계는 대체로 너무나 흐릿하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대상에 대해 더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기에 어떤 앎은 모름을 강화하기도 한다.

영혼에 대한 연구는 영원히 그 대상을 완벽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특수한 아름다움을 가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떤 배움도 그 대상에 대해 완벽한 앎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문학을 연구한다고 문학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의자를 연구한다고 의자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자 한다. 알고자 함으로써 결국 ‘모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앎의 아름다움은 ‘영원한 모름’ 속에 있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