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이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반도체 업계에 빨간불이 켜졌다. 반도체 기업에 지원금을 줄 때 다는 ‘지급 기준’이 독소조항을 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산업계는 ‘반도체 실험·연구시설 접근을 허용하는 기업 우대’ ‘기업의 예상 현금흐름, 수익률 등 내부 정보 제출’ 조건에 주목한다. ‘대외비’로 분류하는 예민한 정보가 고스란히 외부로 새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원금 지급 기준의 세부안이 나올 때까지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신청 여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 상무부에서 지난달 28일 발표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원금 신청 시 기업 정보를 어느 정도까지 공개해야 하는지 분석 중이다. 현재까지 미 상무부가 내놓은 지원금 지급 조건에 반도체 핵심기술이나 기업 전략의 유출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 존재한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업계는 우대 사항 가운데 미 정부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실험·전환·생산시설에 대한 접근을 기꺼이 제공할 수 있는 지원자(기업)를 찾는다’는 대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기술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 업계에선 생산라인 등의 정보를 철저히 대외비로 분류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어디까지, 어떻게 공개하라는 건지 아직 알 수 없으나 반도체 전문가는 공장 배치만 봐도 민감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반도체·디스플레이 담당 연구원은 보고서를 내고 “(미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려다 제조시설의 세부사항, 기술 역량이 공개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미 상무부 발표 내용 가운데 불확실한 부분이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예컨대 사업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전망치를 ‘크게(significantly)’ 웃돌 경우 지원금의 최대 75%를 공유해야 한다는 항목에서 세부규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기업 정보공개 범위, 초과이익 환수 등과 같은 중요한 사항이 모호하다. 리스크를 추정 정도만 할 수 있는 단계”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미국 정부 지원금을 신청하는 데 따른 실익이 있는지 물음표를 붙인다. 다만 악화하는 반도체 업황,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 규모를 고려하면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미 상무부는 지원금을 신청한 기업에 인센티브 390억 달러(약 50조원), 연구·개발비 132억 달러(약 17조원)를 지급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11월부터 미 텍사스주에 170억 달러 규모로 파운드리 신규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SK하이닉스는 150억 달러를 투입해 반도체 후공정 시설을 짓는 걸 검토하고 있다. 지원금 지급을 거절하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도체 동맹’에서 소외되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미 정부는 지원금을 받는 기업들은 최대 10년간 중국에 신규 투자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