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3월이라니, 연진아

입력 2023-03-03 04:05

널리 알려진 문구를 인용하는 일은 피하고 싶다. 그래도 이 문구를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사용할 수 있을까. 김소연 시인의 것이다. “봄-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은 3월을 맞는 마음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일상 언어의 조합이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 딱딱한 땅을 헤집고 보드라운 새싹이 나온다. 어두운 색상의 나뭇가지에 밝은 형광색 연두가 점을 찍는다. 사람은 어린잎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았어도 마음껏 감탄할 수 있다. 봄이구나. 시인은 봄이 기적이되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이라고 했다. ‘봄은 기적’이라고만 했다면 재미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벌써 3월이라니, 선영아라고 습관처럼 외친다. 날은 아직 차갑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다고 분주했던 마음도 여전하다. 그런데 3월인 것이다. 김연수 작가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출간한 것은 벌써 25년 전이었다. 당시 화제였던 광고 카피를 차용한 제목의 이 소설은 당대의 사랑 풍속도를 재치 있게 그린 작품이다. 이제 젊은 독자는 ‘선영이’를 잘 모른다. 지금쯤이라면 화제가 될 제목으로 ‘사랑이라니, 연진아’ 정도가 될 것이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은 자신을 혐오하고 학대한 연진에게 복수한다. 침착한 목소리로 말끝마다 ‘연진아’를 붙였다. 광고에서도 개그에서도 ‘연진아’를 패러디한다. 3월에는 ‘더 글로리’ 시리즈 2부가 시작된다.

문화는 빠르게 변화하며 새것을 형성한다. 자연은 우리가 아는 기적을 잊지 않고 펼친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봄의 자연과 문화 속에서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인간의 오래된 고통과 죽음이다. 살면서 겪는 고통의 순간은 끝이 없다는 듯이 지치지도 않고 찾아든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늘 함께한다.

봄에 읽으면 그 감흥이 배가되는 시집 ‘야생 붓꽃’은 자연의 목소리로 삶의 무게와 환희를 전한다.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 시인의 시집이다. “내 고통의 끝자락에/ 문이 하나 있었어.//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봐: 그대가 죽음이라/ 부르는 걸/ 나 기억하고 있다고”로 시작하는 시 ‘야생 붓꽃’에서는 꽃이 말을 한다. 고통의 끝자락에서 문이 있다고 말하는 꽃의 언어는 사람에게 죽음 너머, 고통 너머의 삶을 엿보게 한다.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거라고:// 내 생명의 한가운데서 거대한/ 물줄기가 솟아났네, 하늘빛 바닷물에/ 깊고 푸른 그림자들이”. ‘야생 붓꽃’ 시는 이렇게 끝난다. 보랏빛이 도는 푸른색으로 피어나는 붓꽃은 어두운 고통의 순간을 넘어서자 솟는 물줄기처럼 깊고 푸른 빛을 얻는다.

거식증과 우울증을 앓았던 루이즈 글릭 시인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알리는 스웨덴 한림원의 연락에도 놀라지 않고 “몇 분 지났죠? 얼른 가서 커피 마셔야 하는데”라고 답해 화제가 됐다. 시인에게 시는 명예를 안겨주는 존재가 아니라 나날의 일상 속에서 삶과 죽음을 명상하게 하는 것이다.

햇빛 한 줌 없는 어두운 대지에 파묻혀 있다가 그 대지가 살짝 휘어지는 세상을 맞이한 봄의 붓꽃은 달라진 경지를 출구로 잇는다.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이든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것’은 고통의 끝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목소리를 찾게 되는 것이라고. 겨울의 땅에서 침묵하던 꽃과 식물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거듭되는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는 매우 희망적으로 비친다. 오래 앓았던 시인은 야생 붓꽃에서 그 희망을 구축한다.

‘더 글로리’의 주인공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 세계는 곧 부서지리라. 3월이 찾아오면 대지가 휘어지고 고통이 출구를 마련할 테니까. 숙연하고 아름다운 시집을 읽으며 3월에 이어질 ‘더 글로리’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3월이라니, 연진아. 절망을 딛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사람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을 안겨준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