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엄청난 고통을 겪은 1997년 외환·금융위기는 기업지배구조 관점에서도 큰 변화를 만들었다. 당시 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달러 유동성 관리 실패가 지적되지만,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의 부적절한 기업지배구조 역시 중요하게 인식됐기 때문이다. 기업이 무너지기까지 경영진이 계속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비효율적 지배구조가 존재했고, 이에 따라 경영진과 지배 대주주가 과도하게 위험을 추구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나라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며 그 조건 가운데 하나로 거시경제적 조처와 함께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한 것이 놀랍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상장회사의 사외이사 도입을 비롯해 경영진을 견제하고 과도한 위험 추구를 제어할 지배구조 개선 노력 등 시장 개혁 작업이 진행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 시장 개혁을 요구하던 미국 역시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붕괴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일련의 사태를 경험한다. 특히 소유권이 분산된 대기업과 대형 금융기관 중심으로 이뤄지던 과도한 위험 추구와 불투명한 경영 활동에 대한 견제 필요성이 고조된다. 이에 자본시장과 금융감독 개혁 그리고 기업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를 장악한 경영진에게 견제되지 않은 권한이 집중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는 저금리가 끝나고 시중 유동성이 축소되며 위기가 발생하던 시기였다. 저금리로 시장에 자금이 넘쳐날 때는 성과가 좋은 것처럼 나타나며 과도한 위험 추구 결과가 경영진 성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유동성이 회수되고 자금이 경색되면 취약한 기업지배구조의 위험성이 더욱 증폭되기 때문에 시장 불안이나 위기를 앞둔 때일수록 취약한 기업지배구조의 개선 필요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최근에도 기업지배구조는 중요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지배구조 문제를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핵심은 경영진은 주인이 아니고 주주(株主)를 위해 일하도록 위임받은 관리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선량한 집사 또는 청지기로 자신의 길을 제대로 가는지에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길을 제대로 가는 집사의 자격은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3장 8∼9절에서는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라며 집사의 자격을 제시한다. 책임성, 투명성, 윤리성과 같은 선량한 관리자의 덕목을 뜻하는 것으로 결국 건전한 기업지배구조에서 강조하는 경영진의 기본 자격이다.
이사회가 이런 자격을 갖춘 경영진을 선임하고 이들의 행동을 견제할 시스템을 갖췄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과거엔 ‘월스트리트 룰’이란 이름으로, 선량한 집사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는 경영진이 있으면 굳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회사의 주식은 팔고 떠나면 될 것 아니냐는 일종의 ‘손절매각(損切賣却)’ 관점도 있었다.
하지만 투자 자산을 장기 보유할 필요성이 있는 기관투자가 입장에서는 이렇게 주식을 팔고 떠나는 수동적인 방식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현대 자본시장에선 연금과 기금을 포함해 장기 투자를 수행하는 기관투자가의 비중과 역할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자본시장의 패러다임 변화와 함께 경영진을 직접 교체하는 행동주의 투자자가 아니어도 기관투자가 중심으로 주식을 팔기보다 경영진 선임 과정에 목소리를 낸다든지 해서 경영진이 충성스러운 집사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만들며, 기업에 건전한 지배구조를 구축하도록 하는 등 투자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투자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