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블루 시그널] 순정적 동경과 그리움만 있다면

입력 2023-03-02 03:03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년은 개울 징검다리에 앉아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에게 비켜달라는 말도 못하고 개울둑에서 지켜만 보다 돌아가곤 한다. 그러자 하루는 소녀가 소년을 향하여 하얀 조약돌을 던지며 말한다. “이, 바보야!”

그러다 둘은 점점 친해지고 산 너머에 가보고 싶다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함께 길을 떠난다. 허수아비를 잡아당겨 춤을 추게도 해 보고, 무를 뽑아 먹기도 하고, 들국화 싸리꽃 도라지꽃 마타리꽃 등을 꺾어 꽃묶음을 만들어 선물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수숫단 속으로 몸을 피한다. 비가 그친 후 물이 불어난 개울을 건널 때 소년은 소녀를 등에 업어준다.

그날 이후, 소녀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나기를 흠뻑 맞은 소녀는 아프기 시작했고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소년은 소녀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 ‘소나기 소녀’의 한마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소녀에게 주려고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에 가서 몰래 호두알까지 따왔는데 끝내 소녀는 개울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소녀는 죽고 만다. 소녀는 소년과 함께 소나기를 맞았을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묻어달라는 말을 남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소년은 기가 막힌 서러움의 노래를 부른다.

‘소나기’야말로 단편소설이 아니었다면 노벨문학상에 걸맞은 불후의 명작이고도 남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걸 첫사랑이라고 쉽게 말하는데 차마 첫사랑이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가볍게 느껴지는 감이 있다. ‘소나기 마을 문학촌’ 촌장인 김종회 교수의 표현대로 순전한 동경과 연모의 감정을 주고받는 이상적, 혹은 근원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몇 주 전에 ‘소나기 마을 문학촌’에 다녀온 적이 있다. 김 교수의 안내로 다녀온 문학촌은 정말 대단했다. 건물 평수만 해도 연건평 2640㎡가 넘고, 땅이 4만6200㎡였다. 다른 문학관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를 시켜놨는데, 디지털 영상으로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구현해 놓음으로써 누구나 소나기에 담긴 감성을 체험하도록 하였다. 새로운 방식의 문학관이었다.

소나기뿐 아니라 소설에 나오는 장면을 모두 영상으로 체험하게 해놓았다. 소나기 체험은 물론 시냇물이 흐르는 것도 체험하고, 돌다리를 건너는 것도 경험하게 하였다. 한 마디로 IT에 익숙한 현대인의 요구에 맞춰 디지털 기술로 ‘하이 콘셉트’와 ‘하이 터치’를 위한 재창작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면 여자는 다 소나기 소녀가 되고, 남자는 소나기 소년이 된다. 여름에는 넓은 뜰에서 실제로 소나기 맞는 것을 체험할 수도 있다고 한다. 책을 한 번 더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문학촌을 다녀오니 스스로 소나기 소년, 소나기 소녀가 되는 것을 느꼈다.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이미 내 머릿속에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눈빛 맑은 소년과 소녀의 모습일까, 아니면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 많고 과격한 꼰대의 모습일까. 소나기가 내려도 좁은 수숫단 속에 앉아서 서로를 걱정하고 지켜주며 행복을 나누었던 소년과 소녀처럼 순수한 사랑을 나눌 수는 없을까.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이렇게 사납고 과격하게 싸우며 분열하게 되었을까.

어느덧, 내 마음에 소나기가 내리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나기 소년, 소나기 소녀와 같은 순수함을 가질 순 없을까. 그런 순정의 사랑으로 한국교회를 하나로 만들 순 없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분열된 초갈등의 사회를 하나로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에게 중요한 건 순수함이다. 그 순수함이 없으니까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순정성 대신 욕망을 가지니까 다투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순수시대를 이루기 위한 순정적 동경과 연모의 마음을 갖자. 정말 순수한 동경과 그리움만 있다면 우리 모두는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