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세대학교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하루에 17시간을 공부한다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의 일상이 유튜브에 소개되며 화제를 모았다. 심지어 학원가에는 초등학생을 위한 의대 입시 준비반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의대 열풍을 짐작할 만하다. 이공계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설립된 영재고를 졸업한 과학 영재들까지도 의대로 몰리는 상황이다.
인재들이 이공계로 진학해서 신기술을 기반으로 저성장 늪에 빠진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미래의 먹거리를 찾아주기 바라는 사회의 요구는 공허하기만 하다. 한국전쟁 이후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체제에서 인재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산업과 연관된 학과로 진학해서 해당 산업의 초석을 다지고 미래 먹거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인기 학과를 살펴보면 10년 후 국가경제를 견인할 산업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식량 증산이 사회의 화두였던 전후 1950년대에는 인재들이 농대로 몰렸고 70년대에는 주곡의 자급을 달성할 수 있었다. 60년대 초 화학공학과와 섬유공학과로 몰려든 인재들이 섬유산업과 비료산업의 기반을 닦으면서 경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됐고, 70년대 정부의 수출주도형 중공업 육성 정책으로 기계공학과에 진학한 인재들은 향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한 자동차산업과 조선업의 초석을 다졌다. 또한 90년대 IT를 신성장 동력으로 삼고자 했던 정부의 관련 산업 진흥정책으로 전자공학과와 컴퓨터공학과가 인기 학과로 자리매김하면서 한국은 IT 강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경제개발 과정에서 이공계 인력 공급을 늘리기 위해 확대했던 관련 학과 정원은 이공계 인력 과잉공급 현상을 유발했다. 이로 인해 이공계 인력에 대한 처우가 악화되고 이공계 기피 현상마저 나타났다. 최근 기술 발전이 성장을 주도하면서 이공계 인력 수요가 다시 증가하고 처우도 개선되고 있지만 과거 이공계 부침에 대한 학습효과로 인해 자격증으로 고수익 일자리를 평생 지켜낼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의대 쏠림 현상도 문제지만 지난 20년 동안 최고의 인재들이 투입된 의료산업이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을지가 더 큰 문제다. 의대에 진학한 인재들을 자격증이 보호하는 고수익 자영업자의 틀에 가둬선 안 된다. 그들을 첨단 바이오헬스 산업으로 유인해 의료산업을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 수준의 임상의학 역량을 타 분야와 접목시켜 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노력이 절실하다.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의대생들에게 연구 중심의 의대 교육 과정을 선택할 수 있게 하거나 더 나아가 공학 기반의 연구 중심 의대를 설립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를 진학하는 의대생들이 진학 시점에서 의사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기초의학과 임상실습 중심의 의대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운영해 임상을 공부하면서 공학, 경영학 등 다양한 학문을 경험하고 의학을 기반으로 다양한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그리고 의사과학자들이 연구 결과물을 쉽게 사업화하고 그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로 구현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의대 졸업생들이 의사가 아닌 다른 진로를 선택할 때 직면하는 불확실성을 낮춰줘야 한다. 일례로 원격진료 등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사업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하고, 플랫폼사업자와 의료계 간 갈등을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조정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의대에 진학한 우수한 인재들을 활용해 첨단 바이오헬스 산업을 육성하는 노력과 함께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대 쏠림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의대 정원을 조정하는 방안도 논의돼야 한다. 인구수 대비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하지만 낮은 수가와 높은 접근성에 기인하는 높은 의료서비스 이용률 때문에 현장에서 체감되는 의사 수는 부족한 상황이다. 물론 일부 공공재 성격을 지닌 의료서비스를 시장 논리만으로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근본적인 의료시스템과 수가체계의 개선을 위한 노력과 함께 수요공급의 법칙이 작동될 수 있는 환경은 조성해야 한다.
박희준(연세대 교수·산업공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