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곧 정의였던 시절에 젊은 날을 보냈다. 영혼이 순수할수록, 인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할수록 치열한 투사가 된다던 시절이다. 숱한 젊은 목숨이 군사정부에 맞서다 스러져 갔다. 살아남은 이들 역시 고문과 강제징집, 불법사찰과 폭력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지난 세월 흘린 피눈물 덕분이다. 한국이 전쟁과 빈곤, 독재의 과거를 딛고 수준 높은 민주주의에 도달한 역사는 분명 세계사적인 성취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부딪혔다. 정의로운 분노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민주화 세대에겐 어쩌면 낯선 도전이다. 이젠 분노가 늘 정의롭지만은 않다. 절대 악이 사라진 대신 절대 선도 분명하지 않다. 자신이 탄 택시의 기사가 세월호 참사 유족을 비난하자 기사의 자식이 대신 죽었으면 좋겠다고 대꾸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건 아닌데’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분노했던 대상을 나도 모르게 닮아간다는 생각 때문이다.
불의를 향한 분노는 우리가 올바른 존재에 더 다가가려 할 때만 정의롭다. 분노의 대상과 내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면 그 분노는 그저 공동체를 파괴할 뿐이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이 실은 우리 편 안에 있을 때도 많다. 우리 편이 꼭 천사인 것도 아니고, 상대가 반드시 악마라고 볼 수도 없다. 이처럼 당연한 사실을 종종 잊는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노와 투쟁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분노와 투쟁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불의에 분노하는 정도에 비례해 나와 세상이 더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분노와 투쟁은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미래세대를 기를 책임이 있는 교육감으로서 나는 매일 고민한다. 우리 아이들 역시 온오프라인에서 매 순간 조롱과 분노, 투쟁의 콘텐츠를 접하고 있다. 아이들이 분노를 위한 분노, 조롱을 위한 조롱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공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려운 고민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분노로 분노를 없앨 수는 없다는 점이다. 조롱과 분노,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타오르는 불길을 끌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독재와 맞섰던 청년 시절의 분노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투사들 역시 분노의 목적은 분노가 아니었다. 억눌리고 다친 이들을 향한 사랑이 목적이었다.
나는 서울 시민들께 “공존의 교육으로 공존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드렸다. 취임 이후에도 줄곧 ‘공존의 교육’을 이야기한다. 분노가 곧 정의로 통하는 사회는 이제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21세기를 넘어 22세기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나와 내 친구들이 청년 시절 품었던 분노 역시 목적은 사랑이었다고. 더 치열하게 사랑하기 위해 분노했던 것이라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