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진 비행기 탑승 행렬… 짧아진 명품 ‘오픈런’ 대기 줄

입력 2023-03-04 04:03
사진=뉴시스

명품 ‘오픈런’이 예전 같지 않다. 문도 열지 않은 백화점 앞에 새벽부터 길게 늘어져 있던 오픈런 줄이 최근 눈에 띄게 줄었다. 밤샘 대기에 동원됐던 텐트도 찾아보기 힘들다. 불과 몇 개월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오며 달아오른 명품 오픈런은 고물가·고금리 시대를 맞으며 가라앉고 있다.

오픈런 경쟁이 가장 심했을 때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오픈런 행렬은 백화점 건물을 한 바퀴 감쌀 정도였다. 300m에 가까운 길이다. 하지만 최근 대기 인원이 눈에 띄게 줄었다. 백화점업계 한 관계자는 “오픈런 대기 인원이 하루 10명 안팎에 그치는 날도 있다”고 말했다. 한때 성행했던 ‘오픈런 대행 알바’도 줄었다. 알바 시급의 시세도 지난해 1만5000원에서 최근 1만원 선까지 떨어졌다.


명품 인기가 가라앉은 것은 백화점 3사의 명품 매출 수치로 확인된다. 지난달 28일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명품 매출 신장률은 9%에 그쳤다. 2021년 4분기 41%까지 올랐으나 1년 만에 32% 포인트 하락했다. 롯데백화점도 비슷하다. 최근 3개월(2022년 11월~2023년 1월) 롯데백화점 명품 매출의 전년 대비 신장률은 10%였다. 같은 기간 2021년에 35%, 지난해에 25%였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떨어진 수치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22%였던 명품 매출 신장률이 올해 들어(1월 1일~2월 27일) 5.8%로 하락했다.

명품시장은 팬데믹 기간 급격하게 성장했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명품시장 규모는 19조4488억원으로 전년보다 8.1% 성장했다. 2021년에도 141억 달러(약 16조원)로 전년 대비 5% 성장했다.


명품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가격도 크게 뛰었다. 1년에 많게는 여섯 차례 가격을 인상한 업체도 있었다. 명품 브랜드 샤넬은 지난해 1·3·8·11월 네 차례 가격을 올렸다. 인상폭은 최대 13%였다. 샤넬의 인기 제품인 ‘클래식 미디움 플랩백’은 지난해 1124만원에서 1316만원으로 17% 넘게 올랐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11월(715만원)과 비교하면 배 가까운 가격이다. 루이비통은 지난해 두 차례, 프라다는 네 차례 가격을 인상했다. 프라다는 2021년에는 무려 6번의 가격 인상을 단행했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명품 업체의 가격 인상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나왔다.

명품 수요가 감소한 추세는 리셀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명품 리셀 플랫폼 ‘크림’에 따르면 ‘샤넬 클래식 미디움 플랩백’ 가격은 지난해 1400만원이었으나 최근 1200만원대로 200만원 가까이 내렸다. 정가보다 200만원 넘는 웃돈을 줘야 구할 수 있었던 제품이 정가(1316만원)보다 싼 가격에 살 수 있게 됐다.

백화점업계 한 관계자는 “명품 수요가 커지면서 오른 리셀 가격이 오픈런을 부추기기도 했는데, 리셀 가격이 내리면서 오픈런 열기가 더 빠르게 식은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명품 성장의 둔화는 해외여행 증가가 핵심 원인으로 지목된다. 코로나 기간 여행 수요가 억눌리면서 명품으로 몰렸던 ‘보복소비’가 다시 여행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직장인 윤모(25)씨는 “예상보다 성과급을 많이 받아서 400만원대의 명품 가방을 사려고 했는데, 해외여행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여행으로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소비심리 위축도 명품 성장 둔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직장인 주모(30)씨는 최근 명품 가방 구매를 포기했다. 주씨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무지출 챌린지’를 하고 있다. 매일 식비를 걱정하면서 명품 가방을 사는 건 욕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명품백을 사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월 소비자심리지수는 전달보다 소폭 하락해 90.2로 나타났다. 2021년 4월 102.2로 올랐던 소비자심리지수는 1년2개월간 100 이상을 기록했으나 지난해 6월부터 두 자릿수로 떨어져 비슷한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명품 매출이 역신장할 만큼 급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관련업계 안팎에서는 성장세가 둔화될 뿐 매출 증가세는 여전히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30~50대 위주였던 명품 소비가 10·20대까지 연령대가 확대되고 있고, 이미 높아진 소비 수준이 급격하게 줄어들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품업계 한 관계자는 “명품이 아닌 ‘노스페이스’ 패딩 점퍼만 입어도 ‘등골 브레이커’라고 하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제는 중고생들도 ‘몽클레르’ 패딩 점퍼를 입고 다닌다”며 “소비 패턴이 바뀌고 명품 소비층이 넓어진 상태라 폭발적 성장은 어렵겠지만 명품 소비는 꾸준히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정하 기자 g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