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챗GPT, 까짓것!

입력 2023-03-01 04:06

우리말 ‘쓰다’에는 여러 뜻이 있다. 글을 쓰고(筆), 입맛에 쓰고(苦), 소비하는 것도 쓴다(費)고 말한다. 사람을 쓰고(庸), 마음을 쓰고(用), 모자를 쓰기(着)도 한다. 이렇게 많은 뜻이 ‘쓰다’ 하나에 있다니, 쓰다는 참 쓰임이 많은 말이고, 우리말은 역시 신통방통한 측면이 있다.

손님 입장에서 편의점은 돈을 쓰는 곳이겠지만 내겐 글을 쓰는 공간이다. 편의점에 있다 보면 하루 종일 글감이 솟고, 창고 구석에 앉아 문장으로 옮긴다. 어느덧 쓰는 일이 내 삶이 됐다. 처음엔 ‘작가’란 호칭이 어색했는데 그렇다고 가게에서처럼 ‘사장’이라 불러 달라기도 애매해 그냥 작가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에세이를 주로 쓰다 보니 ‘에세이스트’는 어떨까 싶었지만 아직 가당찮아 보류했다.

사람이 특정한 직업을 갖고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축적이 필요할까. 기자증을 받았다고 곧장 기자라고 하기에는 쑥스럽고, 조종간을 잡았다고 파일럿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직업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나름의 담금질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내가 에세이를 쓴 지도 벌써 5년. 엊그제 네 번째 에세이집을 펴내게 됐으니 이젠 ‘에세이스트’라고 말해도 부끄러울 정도는 아닐 것 같다.

요샌 어디를 가나 챗GPT가 화제다. 며칠 전 어느 소설가를 만났더니 자신의 직업적 위기감에 대해 하소연하더라. 인공지능(AI)에 소설 주제를 말하고 얼개를 짜 달라고 부탁했더니 결과물이 자신이 몇 날 며칠 고민했던 것보다 훌륭하게 느껴져 자괴감에 빠졌다나. 앞으로 소설가라는 직업은 AI가 골라준 스토리를 다듬는 정도로만 남지 않을까 하면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옆에서 “그래도 인간은 살아남을 거야”라고 위로했지만 ‘사람이 글을 쓰는 세상’의 끝자락에 우리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잠깐 스치기도 했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문득 이런 계산적인(?) 생각도 했더랬다. AI 발달로 소설가의 삶은 조금 변화가 있을지 몰라도 에세이스트의 역할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설은 AI가 끼적일 수 있겠지만 ‘자기 서사’를 기본으로 하는 에세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장르이며, AI가 만약 그런 것을 쓴다면 이미 에세이가 아니게 된다. 아, AI의 자기 에세이는 있을 수 있겠군.

어쭙잖게 꾸준히 에세이를 쓰고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다 보니 ‘에세이 잘 쓰는 법’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때마다 “보고 느낀 대로 쓰면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교과서에만 충실했더니 수능 만점 받았어요’라는 식의 재수 없는 답변인 건 알지만 그 이상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잘 쓰려 애쓰지 말고 쉽게 쓰려 노력하고, 있는 그대로만 쓰면 된다. AI가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기도 하다.

결국 ‘사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AI가 인생을 대충 끼적일 수는 있겠지만 살지 못한 삶에 대한 허상일 따름이며 오직 인간만이 ‘살아본’ 삶을 쓸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사랑해야 할 이유 또한 충분하지 않은가. 허상이 넘칠수록 인생의 의미에 대한 갈망은 높아질 것이며, ‘사람의 길’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나름의 낙관적 전망을 해본다. 허탈감에 빠진 소설가에게도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AI가 발달할수록 소설가의 가치는 더욱 소중히 빛날 것이라고.

네 번째 에세이집 제목은 ‘셔터를 올리며’로 정했다. 기계 장치와 리모컨이 셔터를 올릴 순 있어도 셔터가 올라가는 순간의 감촉은 겪어본 자만이 고스란히 전할 수 있는 영역이다. 챗GPT, 쳇, 까짓것! AI에 앎이 있다면 우리에겐 삶이 있고, AI에 지식이 있다면 우리에겐 지혜가 있다. ‘쓰는’ 사람이 되길 참 잘했다.

봉달호(에세이스트·편의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