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명문대 가고 피해자 피눈물… 학폭 복수극 ‘더 글로리’ 현실엔 없다

입력 2023-02-28 04:09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한 장면. 국민일보DB

2020년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A군은 학교 측에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되레 ‘쌍방 학폭’으로 신고를 당했다. A군이 괴롭힘을 방어하면서 발생한 신체 접촉이 폭행이라는 게 가해 학생 주장이었다. A군을 절망으로 몰았던 가해 학생은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에서 서면사과와 사회봉사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가해 학생은 이에 불복해 소송으로 맞섰다. 이후 대법원까지 2년여의 긴 싸움이 이어졌지만 학교폭력 판단과 징계 과정에서 절차상 하자가 발견돼 학폭위의 처분 자체가 취소됐다.

대법원 판결 이후 가해 학생은 “대법원에서 취소 결정을 내렸으니 난 잘못이 없다”며 기세등등한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결국 다시 학폭위가 열리면서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사건 관계자는 27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은 이미 상처를 많이 받아서 다시 언급하기를 꺼리는데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게 되면 피해 회복도 안 될뿐더러 당장 (피해자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정순신 변호사가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자녀 학교폭력 논란으로 불명예 퇴진한 것을 계기로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의 고통을 헤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된 이후 가해자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의 드라마 ‘더 글로리’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현실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의 고통만 깊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별다른 처벌도 반성도 없이 지내는 가해자의 모습은 피해자에겐 고통이 된다. B군의 경우 중학교 2~3학년 때 자신을 성추행했던 동급생을 보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힘들어하고 있다. 가해 학생은 B군의 영상을 찍어 임의로 유튜브에 올리고 ‘악플’도 유도했다. B군은 피해 상담에서 “나는 지금까지도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데, 나를 괴롭힌 학생들은 명문대도 가고 잘살고 있어 나도, 가족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B군은 공황장애, 조현병 등 증상으로 여전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자 김모(20)씨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를 건네는 가해자 태도에 더 큰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그는 “나를 괴롭혔던 애들이 동네에서 나를 알아보고 내 이름을 부를 때 ‘난 여전히 저 애들한테 만만한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교사와 전문가들은 피해 학생 중심의 보호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학교폭력 이후의 해결 과정을 교육의 일환으로 두다 보니까 결국 가해자 선도를 강조하게 된다”며 “가해 학생은 법 테두리 안에서 모든 대응을 다 해볼 수 있지만 피해자는 처분을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한마디로 당하는 사람만 손해”라고 말했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학교폭력 피해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면 사회시스템 전반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쌓이게 되고, 사회 적응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성윤수 김용현 백재연 기자 tigri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