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남아 있는 나날들

입력 2023-02-28 03:04

침대에 앉아 묵직한 책의 행간을 꾹꾹 누른다. 눈은 옛것 속에 갇혀 있고 손가락만이 글을 읽는다. 구부정한 할머니의 허리는 미동도 없다.

“거 누구요, 누가 자꾸 내 방에 들어오는 거지?”

안경 너머로 치켜뜬 눈이 주름진 세월을 당겼다. 불만 섞인 목소리다. “할머니! 저희 엄마 뵈러 왔어요.”

문밖의 세상이 할머니를 깨웠을까 깊고 깊은 눈이 고개를 들었다. 멈춰버린 기억의 시간은 짧았다.

“미안해요.” 연약한 음성에 부끄러움이 섞였다.

“내가 요양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꾸만 실수해요.” 손끝에 머무른 낡은 성경책에 지나온 삶이 다가갔다.

“실수하지 않으셨어요. 할머니 방에 제가 들어온 거예요.”

사부작거리며 옷가지를 개고 있는 할머니 옆에 엄마가 있다. 딸의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는 엄마. 같은 듯 다른 세상들이 무관심의 조용함을 먹고 사는 곳. 엄마의 방이다.

할머니는 한 권의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요양원에 들어왔다. 정갈하게 정리된 빈 침대 위에 남은 인생이 얹어지고, 낡은 서랍 귀퉁이에 성경책을 내려놓을 때.

남아 있는 나날들을 손때 묻은 성경책에 조용히 넣었다.

“오늘도 성경책을 읽으시네요. 할머니. 참 고우세요.”

“내가 치매일 때 어떤 모습인지 혹시나 본 적 있을까요? 갑자기 궁금해서 그래요.”

“언제나 성경책을 읽고 계셨어요.” 할머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나갔다.

“인간이란 자기 괴로움을 세는 것만 좋아하지 자기 행복은 세질 않아. 만약 제대로만 센다면 누구나 자기 몫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 <지하로부터 온 수기>

엄마와 할머니의 방에 행복이 조금씩 세어졌다. 암울한 색조가 생각을 잡아먹고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가도, 들에 핀 국화와 코스모스를 기억하며 수줍게 미소 지을 때도, 할머니의 행복은 낡은 성경책에서 피어났다. 생각해 보면 행복해서 삶이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 삶이 소중한 것을 알았고 그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사모했기에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었다.

짧은 길을 긴 시간 들여서 걸어가는 자는 많은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 길에 놓여 있는 작고 연약한 것들까지 깊고 세심하게 보며 행복을 느낀다. 자신의 처한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 눈앞에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마음. 그것은 자기 몫을 세어 가는 삶이 아닐까 싶다.

소리조차 메마른 방이었다. 매우 조용했다. 공허한 시선은 날개를 달았고 점점 더 단순해지는 생각들이 알 수 없는 세계로 침잠시켰다. 그랬던 날에 소리를 가진 할머니가 엄마 옆에 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희미한 삶 하나가 엄마를 향했다.

흔들리는 손끝에 가녀린 생명을 살아내고 있었던 엄마. 바람의 향기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오셨다.

붙잡지 못한 기억이 믿음조차 가져가 버린 줄 알았는데…. 엄마의 입에서 연약한 호흡을 내뱉게 했다.

할머니의 성경 읽는 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에 예배당 바닥에 방석을 내려 놓는 여인이 나타났다.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거친손을 모은다. 조용한 기도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짧고 깊은 고백이 딸의 귀에 들렸다.

“진희야……. 하나님을 안다.”

장진희 사모(그이름교회)
약력 : 새안산 감리교회(현 꿈의교회) 선교유치원장, ‘마음에 길을 내는 하루’ 저자, 그이름교회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