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거부권

입력 2023-02-28 04:10

거부권은 고대 로마에서 시작됐다. 난폭한 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을 택한 로마 시민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집정관을 뽑았다. 군사지휘권을 독점적으로 누렸고,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원로원·민회를 언제든 소집했다. 왕이 되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 로마 시민들은 곧바로 견제 장치를 만들었다. 집정관 2명이 한 달씩 교대로 나라를 다스리되, 실무를 맡지 않는 집정관에게 거부권을 준 것이다. 집정관은 최소한 다른 집정관의 동의를 얻어야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거부권이 근대 민주주의에서 되살아난 건 미국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채택하면서부터다. 헌법의 기본 원칙은 삼권분립인데 의회의 입법권에 맞설 행정부의 권한이 마땅치 않았다. 이 문제는 의회의 입법 절차를 명시한 헌법 7조에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을 넣어 해결됐다. 고대 로마에서 고안됐고,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은 전제군주가 무지한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명맥이 유지된 거부권이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의 맹점을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로 자리잡은 것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첫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인구 비례에 맞지 않게 하원 의석을 늘리는 법안을 의회로 돌려보낸 뒤 대통령 46명이 무려 2584번 행사했다. 대통령을 4번 연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635번으로 최다 기록 보유자다. 22·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브랜드가 행사한 584번 중에는 가뭄에 시달리는 텍사스 농민에게 곡물을 지원하는 법도 포함돼 있다. 특정 주의 재해를 연방법으로 돕는 것이 옳지 않다는 논리인데, 아직도 뒷말이 많다.

우리나라 헌법도 거부권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처럼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국회의 입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견제 수단이다. 지금 같은 비타협 정치가 계속된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부권을 많이 행사한 대통령으로 남을지 모른다. 아무리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거부권이 거론되는 정치는 역시 불편하다.

고승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