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경의 에듀 서치] 대입 수능, 우리사회 ‘예비 악인’을 거를 필터가 없다

입력 2023-02-28 04:06
2023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 지난해 11월 17일 한 수험생의 책상 위에 수험표와 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수능시험은 초·중·고 12년 학창 시절에서 단 하루지만 가장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날이다. 연합뉴스

영화 ‘굿 윌 헌팅’에는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인 램보 교수와 대학 동기인 심리학 교수 숀의 술집 논쟁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천재 학생 윌 헌팅의 앞날을 두고 입씨름을 벌입니다. 램보는 윌의 천재성이 빨리 깨어나도록 몰아붙이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수학계를 들썩이게 하고 싶어 조바심 내는 사람이죠. 반면 숀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당한 가정폭력으로 비뚤어져버린 윌의 마음부터 치료하자고 합니다. 두 사람은 술집 주인을 중간에 놓고 이런 논쟁을 벌입니다.

램보가 술집 주인에게 “아이슈타인 알아?”라고 물으며 포문을 엽니다. 술집 주인이 당연하다는 듯 “안다”고 말하자 “그럼 램보는”이라고 또 묻습니다. 술집 주인은 램보의 면전에서 ‘그게 누구인데’라는 표정으로 “모른다”고 합니다. 램보는 만족스러운 듯 숀에게 “봤지? 이건 내 개인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윌은 필즈상을 받은 자신은 비교하기 어려운, 술집 주인도 아는 아이슈타인처럼 될 재목이다. 중요한 수학적 업적을 이룩하는 일이니 윌이 시간 낭비하게 두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숀이 응수합니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를 알아?”(숀) “몰라 그게 누구야”(램보) “버클리대 교수를 지낸 수학 천재야”(숀). 램보가 ‘그런 수학자가 있었나’라고 머뭇거리자 숀이 술집 주인에게 물어봅니다. 술집 주인은 지체 없이 “유나바머”(미국의 연쇄 폭탄테러범)라고 외칩니다. 램보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누구나 아는 과학자가 될 수도 있지만, 누구나 아는 테러범이 될 수 있다고 받아친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부족한, 흔히 말하는 ‘인간 덜 된 자’들이 학교에서 지식을 쌓아 사회의 일원으로 나오는 건 께름칙한 일입니다. 이런 이들이 영민하거나 성실해 명문대에 들어가 ‘엘리트’라는 타이틀까지 달고 나온다면 더욱 오싹합니다. 회사나 조직을 이끄는 리더에 오른다면 그 자체로 ‘흉기’일 수 있습니다. 교육 시스템은 우리 사회를 떠받칠 인재를 키우는 기능을 하지만, ‘예비 악인’이 높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걸러주는 역할도 필요합니다. 사회를 지키는 일차 방어선이겠죠.

학교를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합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힘의 논리는 작동합니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는 어른들 세계의 법과 규범, 사회적 시선 같은 제약이 좀 더 느슨한 게 사실입니다. 학교는 종종 정글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숙도가 서로 다른 인격체들이 하루의 3분의 1을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폭력을 완전히 근절할 수 없듯 학교폭력도 뿌리 뽑기 어려운 이유일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며 가해자로 군림하는 아이들, 교육 제도가 닦아놓은 엘리트 코스에서 일차로 거를 대상입니다.

쉬운 일일까요. 많은 학교폭력 사례들이 ‘A가 B를 때렸다’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학교폭력에서 학생은 가해자 피해자 중재자 방관자 네 부류로 나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중재자가 뒤섞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리적 폭력을 가하고 문제가 불거지자 언어폭력을 걸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평생 상처가 될 언어폭력에 시달리던 학생이 참다 못 해 한 대 때렸는데 가해자란 낙인이 찍힌 경우도 있습니다. 집단 괴롭힘을 막으려고 중재하던 아이가 가해자로 몰리기도 하죠. 실제로 반성하고 거듭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학교폭력 처분 ‘○호’로 낙인찍어 학생의 앞길을 막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가해자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고, 피해자의 상처가 곪지 않도록 돕고, 방관자들이 중재자로 성장하도록 하려면 말이죠. 진짜 반성 없는 가해자를 가려내기 위해서라도 학교폭력은 정교하게 다뤄져야 합니다.

다소 엉성하긴 해도 제도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학교와 교육 당국은 전담 경찰관 등이 참여하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를 열고 사안의 심각성이나 반성 정도 등을 종합 판단해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합니다. 학교폭력 사안을 학폭위에서 한 번, 대학 입시에서 또 한 번 판단을 받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대입 수시모집에서 벌을 주는 장치인데, 학생과 학부모 모두에게 던진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성이 없었고 반성하지도 않을 가해자들이 명문대에 가기 어렵게 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는 이런 필터가 없습니다. 정시모집에서 수능 성적표는 국가가 부여한 입학 허가증입니다. ‘이 점수면 서울대, 이 점수는 고려대나 연세대’ 하는 식으로 학생이 성적표를 들이밀면 대학은 합격증을 내줘야 합니다. 인성 같은 걸 들먹이며 고득점자를 탈락시키면 부정입시가 됩니다. 엘리트 코스로 일컬어지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른바 ‘스카이 대학’을 비롯해 학생과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서울 소재 16개 대학의 경우 정시에서 40% 이상 뽑도록 정부가 강제하고 있으며 실질 비율은 45% 안팎입니다. 나머지 대학들에 비해 10% 포인트 이상 높습니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하루 만에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정 변호사의 아들은 고교 때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친구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다 학폭위에 넘겨졌습니다. 법조인 아버지 후광에도 강제전학 처분을 면할 수 없었고, 학교생활기록부에서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수시모집에선 길이 막힌 겁니다. 서울대 합격 통로는 정시 수능 100% 전형이었습니다. 순수 정량평가라서 합격을 물릴 방법도 없을 겁니다. 정 변호사의 아들이 부디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돼 있길 기대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 됨됨이 말고 표준점수와 백분위 점수만으로 의사도 되고 약사도 되고 공학도도 되는 경쟁,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을까요.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