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10억’에 가려진 노동의 암울한 미래

입력 2023-02-27 04:02

‘퇴직금 10억원에 5대 은행에서 2200여명이 짐 쌌다’는 뉴스가 나오자 대통령은 “은행이 돈잔치를 벌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 질타에 은행들은 곧바로 10조원의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금리 인하에 나섰다.

한데 과연 몇 명이나 10억원을 받았을까. 한 은행의 상위 5명이 10억원 넘는 퇴직금을 받았고, 2200여명 퇴직자 대부분은 3억여원의 특별퇴직금에 법정퇴직금을 더해 최소 6억원을 받았다. 물론 6억원도 서민들에겐 평생 걸려도 모으기 어려운 돈이다. 가구당 6838만원의 금융부채(작년 통계청 조사)를 안고 고금리에 숨이 막히는 국민들로선 내가 낸 이자로 잔치했다고 느낄 만하다.

하지만 은행의 돈잔치에 정부는 자유로운가. 시중 자금이 은행의 고금리 정기예금으로 몰린다는 기사가 쏟아진 게 지난해 10월이다. 금융당국이 우려를 표하자 예금금리는 석 달 만에 2% 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다. 대출금리를 그만큼 내리지 않으니 예대금리 격차는 더 벌어졌다. 은행이 예대마진을 키워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동안 정부는 과연 무엇을 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이런 논란 속에 은행들은 상반기 신규 채용 계획을 내놓았다. 매년 줄여오던 채용 숫자를 갑자기 늘렸고, 5대 은행은 1500명을 뽑겠다고 발표했다. 6년 전인 2017년에도 비슷했다. ‘일자리 정부’를 표방한 문재인정부가 출범하자 금융권은 수천명의 신규 채용 계획으로 화답을 했다. 이용자들이 대부분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어 지점과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수천명의 신규 채용이 적절하냐는 의문에 은행도 정부도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은행은 매년 특별퇴직금 예산 수천억원을 편성했다. 다른 문제는 나중 일이라는 듯.

돈잔치 논란에 가려진 근본 문제는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 ‘신의 직장’으로 불리던 은행에서 해마다 수천명씩 퇴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는 만 40세까지 퇴직 대상에 포함됐다. 평균 연봉 1억원의 은행원들이 왜 10년 이상 남은 정년을 포기하고 짐을 싸는가. 매년 수백개씩 지점이 줄어들어 버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로봇이 떡볶이를 조리하고 인공지능(AI)이 각종 상담을 대신하는 시대를 맞아 수많은 일자리가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다. 돈잔치 질타도, 신규 채용을 늘리는 것도 노동의 미래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최근 현대자동차가 신규 인력 700명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내자 서점에 현대차 입사시험서가 등장하고, 높은 연봉에 정년이 보장되는 일자리라 공무원들까지 응시를 준비한다는 보도도 나온다. 그런데 과연 그곳은 안전지대일까.

외환위기의 터널을 막 빠져나온 20여년 전, 현대차 노사는 ‘신규 인력 채용은 노조와 협의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현대차는 국내에 공장을 짓지 않았다. 그렇다고 국내 생산라인이 기존 인력만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다. 사내 하청 확대, 비정규직이 그 수요를 채웠다. 현대차 노사는 지난해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공장 신설에 합의했다. 전기차 생산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기차가 더 많이 보급되면 기존 생산라인은 축소될 수밖에 없고, 본사만이 아니라 납품업체까지 수만개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 노동조합인 한국노총 금융노조의 은행과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현대차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 이상 안전한 일자리는 없음을 보여준다. 강력한 조합의 힘으로 특별퇴직금을 늘리고, 생산라인이 줄어들어도 정년을 지킬 수 있을지언정 이미 조합 밖 세상에는 폭풍이 치고 있다.

독일 정부는 디지털시대를 맞아 ‘인더스트리 4.0’을 준비하며 노조를 참여시켜 합의를 추구했다. 노동 유연성 타협, 광범위한 직업훈련과 평생교육 등 조합 밖 노동자들까지 포괄하는 대책은 노조의 참여와 동의를 바탕으로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정부는 노동개혁을 내세우며 전쟁이라도 하듯 노조의 적폐와 기득권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거친 언사, 노조를 적으로 돌리는 전쟁으로 과연 진정한 개혁이 가능할까. 오히려 노조가 개혁 논의 참여를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거친 말들은 누군가의 속을 잠시 시원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불안한 노동의 미래에 몸을 맡겨야 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지는 못한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