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대법원장의 ‘조용한 퇴사’

입력 2023-02-27 04:06

개인적으로 최근 곽상도 전 의원의 ‘50억 클럽’ 1심 무죄 판결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이 있다. 곽 전 의원 2심 재판을 심리할 서울고법에서 15명의 판사가 줄사표를 낸 일이다. 한 법원에서 정원 10%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는데, 1명 빼고 전원이 5대 로펌으로 향했다. 모두 법원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이들이었다.

처음엔 매년 인사철마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들여다볼수록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작년 11명보다 사표 규모가 더 늘었다. 한 고위 법관은 “한 조직에서 10%가 사표를 냈다면 그 조직에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나가는 이유였다. 자녀 교육 때문에 돈 좀 벌어보려고 한다며 너스레를 떨던 법관들은 속내를 말해 달라는 채근에 “솔직히 앞이 안 보인다”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경제적 이유보다 법원에선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체념이 더 크다는 것이다. 단순히 개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일이라는 게 법원 내 많은 이들의 진단이다.

사표를 낸 이들은 대부분 ‘10조 판사’로 불리던 법관이다. 법관인사규칙 10조에 따라 고등법원에서만 근무하는 판사들에게 붙은 별칭이다. 2010년부터 1심(지법) 판사들은 1심 법원에서만, 2심(고법) 판사들은 2심 법원에서만 일하는 ‘법원 이원화’ 제도가 시행될 때 고법을 선택한 이들이다. 판사들이 승진에 목을 매던 관례를 없애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것이 제도 취지였다. 기존엔 1심 판사를 거쳐 2심으로 넘어가 ‘법관의 꽃’인 고법 부장판사 자리에 오르는 것이 소위 승진 코스로 통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고법 부장 승진 제도를 없애고, 각급 법원 판사가 직접 법원장을 뽑는 추천제를 만들었다. 1·2심 법원의 ‘각자도생’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좋은 취지였지만 현실은 고법 판사 사표만 부채질하는 꼴이 됐다. 나이 50줄에 같은 연차 판사들이 1심 법원의 경우 법원장을 하고, 2심 법원에선 사실상 배석판사 역할에 머무르면서 높은 업무 강도에 치이며 법관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만 키웠다는 것이다. “동기는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을 하는데, 본인은 정년까지 기존 고법 부장의 보조 역할만 해야 한다면 로펌의 러브콜에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이런 박탈감은 상고심을 지탱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의 사표 행렬로 번지고 있다. 법원의 ‘허리’와 ‘머리’가 동시에 무너지는 형국이다.

법원도 이런 부작용을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우려의 목소리도 꾸준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제도 개선보다 판사 수를 5년간 370명 늘리는 방안을 추진했다. 상하탱석식 땜질을 택한 것이다. 이젠 제도를 과거로 되돌린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게 내부 중론이다. ‘워라밸 확대’ 등 달라진 법원 문화 속에 근속 동기를 높이고 무너진 인력 구조를 재건할 해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요즘 법원은 이런 식으로 손쓰기 어려운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김 대법원장이 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게 법관들의 한목소리다. 이형근 고법(특허법원) 판사는 최근 법률신문 기고에서 민·형사재판의 심각한 적체 현상을 지적하며 “코로나19나 사건의 복잡화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사법행정권자들이 침묵한 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재판’을 외친 김명수 코트가 정작 6년 임기 동안 재판 문제 해결에 손을 놨다는 것이다. 일선 판사들 사이에 “김 대법원장은 이미 ‘조용한 퇴사’ 상태”라는 개탄이 나오는 이유다.

사법부의 혼란은 단순한 과도기적 현상이나 정책 착오로 넘기기엔 국민이 겪을 대가가 너무 크고 직접적이다. 제왕적 대법원장 탈피가 마땅히 팔 걷고 나설 문제에 손을 놓는 명분이 돼선 안 된다. 새 사법부 수장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도 전임자보다는 나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양민철 사회부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