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아이돌은 언제까지 ‘생존’해야 하나

입력 2023-02-24 04:03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 게 작년에 왔던 각설이만은 아니라는 게 슬퍼질 때가 있다. 2023년을 여는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범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불과 4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엠넷 ‘프로듀스101’ 시리즈 투표 조작 사건으로 잠시 주춤했던 오디션 열기에 다시 불이 붙었다. 싸늘한 잿더미를 제일 먼저 쑤신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의 중심에 있던 방송사 엠넷이었다.

엠넷 ‘보이즈 플래닛’은 이미 재작년 조용히 선보인 ‘걸스플래닛999’라는, 같은 얼굴에 점만 찍고 돌아온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의 후속작이자 남성 그룹 편이다. 그동안 국제화된 업계 반경을 자랑하듯 일본 중국 베트남 태국 캐나다를 비롯한 84개국 229개 매니지먼트사에서 도전장을 내놓았다며 홍보한 프로그램 오프닝은 낯선 외부 전문기관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투표 조작 사건으로 인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듯 투표의 투명성 및 공정성 확보를 위해 외부 전문기관인 삼일PwC의 검증 절차를 거친다는 검은 화면이 매회 차 뜬다. 주어도 목적어도 불분명한 반성문을 매주 받아보는 묘한 기분으로, 종종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보이즈 플래닛’과 2주 간격을 두고 시작한 JTBC ‘피크타임’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의 ‘이렇게까지’는 앞선 ‘이렇게까지’와 포인트가 조금 다르다. 방영 전부터 최근 수년간 드물게 호평받은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 제작진이 만든 것으로 잘 알려진 ‘피크타임’의 목적은 새로운 그룹의 탄생이 아닌 재능은 있지만 기회가 없었던 기존 그룹들의 재도약이다. 실제로 방송 후 동방신기 ‘주문’을 3인조로 완벽하게 소화한 팀 23시, 세븐틴 ‘아낀다’를 원곡 에너지 그대로 청량하게 소화한 팀 11시, 2012년 데뷔한 그룹 B.A.P. 출신으로 꽉 찬 1인 무대를 선보인 문종업 등의 무대가 화제를 모았다.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숫자로 불리는 점까지, ‘싱어게인’과 같은 토대 위에 선 아이돌 주연의 새 시리즈인 셈이다.

‘피크타임’의 ‘이렇게까지’는 참여 그룹들의 사연과 함께 온다. 뛰어난 무대 실력으로 단번에 우승 후보까지 넘보게 된 팀 11시의 별명은 ‘알바돌’이다. 소속사라고 해도 회사에는 대표와 그룹 멤버들뿐이고, 덕분에 일부 멤버는 가수 몫만이 아닌 회사 직원 몫도 도맡아야 한다. 변변한 활동이 없으니 대표에서 멤버들까지 본업 외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패스트푸드점 배달에서 영화관 미소지기까지, 딱 그 나이 또래가 할 만한 아르바이트 명칭들이 쏟아졌다. 1년이 조금 넘는 짧은 활동 기간, 교체 멤버로 투입된 후 이어진 무기한 공백기로 11년이라는 시간을 이 무대 하나를 위해 기다려왔다는 팀 10시 멤버 오연준의 말에 다시 또 울컥, ‘이렇게까지’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만드나.

프로그램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갖은 ‘이렇게까지’를 자아내는 출연자들을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다. 고작 몇 초, 몇 분 보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오랜 꿈을 쉽게 말하는 건 얼마나 건방진 일인가. 오로지 살아남는 걸 목표로 흘린 땀으로 흥건한 연습실 바닥이 하나, 실력이 부족하면 사연에서 눈물까지 뭐라도 팔아야 하는 고된 간절함이 하나, 그래도 바래지 않는 꿈의 빛이 하나, 거짓을 선동하거나 방조했던 인물과 방송사를 다 털어내지 못한 채 또다시 다음 사랑을 찾아 떠나는, 알고 하는 무지몽매의 시선에 하나, 무게추가 하나씩 더해진다. 다음 달 시작을 앞둔 MBC ‘방과 후 설렘’의 후속 ‘소년 판타지’도 이 무게추의 기본값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이돌들은 언제까지 ‘생존’해야 할까? 이 모든 일이 아무렇지 않고 때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생존을 인질로 잡고 흔드는 게임이 주는 피로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