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에 귀가 뜨이는 경험을 해보라”는 지인의 말에 얇은 귀를 가진 나는 오랜만에 연주회 나들이에 나섰다. 파이프오르간이 근사하게 놓인 공간에 들어선 직후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연주가 끝난 듯 보여도 끝난 게 아닐 수 있으니 박수는 차분히 기다렸다가 쳐달라는 말이 나왔다.
문득 어린 시절 창피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학교에서 클래식 연주회를 열었는데 방송반이던 내가 사회를 맡았다. 곡이 끝나고 마이크를 들어 말을 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뿔싸, 1악장이 끝났을 뿐인데 나는 곡이 끝난 줄로 안 거였다. 그 이후로 클래식 공연을 보게 되면 곤두선 기운에 집중하게 됐다. 바이올린의 활이 살아 있고, 지휘봉 끝에 긴장감이 남아 있으면 악장이 끝났을 뿐이다. 연주자와 관객 모두가 목과 어깨의 힘을 풀고 재정비를 하는 기운이 공간을 감도는 찰나가 오면 그제야 박수를 친다.
비슷한 경험을 검도에서도 배운다. 검도 용어 중 ‘존심(存心)’이라는 말이 있다. 온몸의 기를 모아 타격을 하고, 공격 후에 이겼다고 해도 결코 방심하지 않고 예의와 자세를 갖추는 것을 뜻한다. 칼끝, 발끝이 계속 살아 있는 거다. 신기한 것은 대련을 하는 상대방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 기운을 느낀다는 거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결코 자만하지도 무너지지도 않겠구나 싶은 힘이 있다. 악장과 악장 사이를 빈 공간으로 만들지 않고 여전히 연주가 살아 있게 하는 힘과 검도의 존심이라는 것이 어쩐지 비슷한 것 같았다.
세상이 무척 혼란스럽다. 다이내믹하게 악장이 변하고, 타격이 줄 잇는 공간에 놓인 것만 같다. 타인들이 구축한 세상에서 살며 사랑한다는 것은 퍽 버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존심을 지킨다는 건, 이런 가운데서도 나의 세상을 견고하게 다진다는 뜻 아닐까. 그 팽팽하게 살아 있는 기운들을 모아 함께 훌륭한 연주를 해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유재연 옐로우독 AI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