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독서 여정의 출발점은 친구에게 들었던 이 한마디 말 때문이었습니다. “넌 어려워서 못 읽을 거야!” 신학교 1학년 교정에서 만난 동기 여학생이 건넨 이 말은 스무 살 신학생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지만, 동시에 그 말은 제 독서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그때 저를 곤혹스럽게 했던 책은 로즈마리 류터의 ‘메시야왕국’입니다. 지금도 책꽂이에 꽂혀있는 빛바랜 그 책을 볼 때마다 옛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사람은 미숙하기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영원히 미완성이기에 넘어집니다. 6살 아이처럼 60세가 되어도 실수하는 것은 둘 다 처음 맞이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어른도 넘어집니다. 좋은 책은 우리의 미숙함을 채워주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시인은 그저 높게 넓게 뻗어 나가고 드높은 하늘로 머리를 밀어 넣고 싶을 따름이다. 하늘을 자기 머릿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자는 바로 논리학자이다. 그래서 그의 머리가 쪼개지는 것이다.”
체스터턴의 ‘정통’을 읽다가 이 문장을 발견했고 저도 모르게 꽈당(?) 넘어졌습니다. 잠시 성경이 어떤 책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숙고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신학자(신자)는 논리학자보다는 시인에 가깝고, 신자의 삶은 곳곳에 숨어 있는 ‘재미’(在美)를 발견하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스터턴은 신자의 삶이 기독교 정통 교리라는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하기에 신나는 모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무정부 상태에서는 어떤 모험도 기대할 수 없다고 일갈합니다. 교리와 설계가 있는 숲을 통과하고 권위가 서 있는 땅을 여행할 때는 얼마든지 모험을 기대할 수 있지만, 유물론 회의주의 과학주의 등 치안이 불안한 곳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그는 말합니다.
‘정통’을 읽고 난 다음 제 독서 여정은 물론이고 인생과 목회에도 큰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관점과 그에 대한 정신이 달라지니 권태가 사라지고 설렘이 회복되었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과 인간이 가진 협소한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겉모습은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차이가 납니다. 바로 넘어질 때입니다.
기독교 정통 교리는 역설과 모순을 수용하되 언제나 그 너머를 지향합니다. 좁은 논리에 갇히지 않고 창문을 열어 시원한 공기를 주입합니다. 신자는 자기 머리에 하늘을 넣지 않고 하늘에 머리를 넣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교회와 신자를 이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정통’을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떠오른 문장입니다. “좋은 책을 모아 놓은 도서관은 좋은 도서관이지만 위대한 도서관은 모든 책을 모아 놓은 도서관입니다. 성경은 위대한 도서관입니다.”
(광주 충광교회 ‘들리는 설교 유혹하는 예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