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처음이라는 것은 대부분 당사자에겐 영광스럽고, 보는 이들을 설레게 하는 경우가 많다. 2004년 4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고속철도(KTX)가 개통됐을 때 대한민국은 한 단계 크게 도약했다. 언론은 연일 ‘속도 혁명이 시작됐다’ ‘전국이 2시간대 생활권에 접어들었다’ ‘유럽과의 철의 실크로드가 완성된다’고 보도했다. 시속 300㎞로 달리는 고속철도에 처음 탑승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13년 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김 선수가 한국인 최초로 2006년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고, 이후 각종 대회에서 자신의 세계신기록을 연이어 경신하는 걸 보면서 많은 국민은 김 선수와 함께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을 것이다. 마침내 그가 동계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섰을 땐 함께 웃고 울었다. 역사상 최초라는 것은 이처럼 감동적이고, 행복하고, 설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여의도만 오면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 ‘반목의 대명사’가 되는 걸까. 지난해부터 한국 정치권에서는 헌정사 최초라는 기록이 수없이 쏟아졌지만 그 어느 것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가장 가까운 기록은 지난 16일 세워졌다. 검찰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제1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헌정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오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처음으로 제1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질 예정이다.
민주당도 지난해 대선 이후 여러 차례 헌정사 최초 기록을 세웠다. 민주당은 지난해 10월 윤석열 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보이콧했다. 야당 의원들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시정연설에 아예 입장조차 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민주당은 또 지난 8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 역시 헌정사 최초로 이에 대한 판단은 이제 헌법재판소의 몫이 됐다.
과반을 훌쩍 넘긴 민주당 의석수(169석)를 감안하면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런데도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민주당은 검찰의 저의부터 의심했다. 민주당 지도부의 한 의원은 “검찰이 노린 것은 결국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 ‘방탄 프레임’을 강화하려는 것 아니겠냐”면서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말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공세를 취한 것은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지난해 9월 ‘외교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서 처리했다. 석 달 뒤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이상민 장관 해임건의안도 통과시켰다. 예상했던 대로 윤 대통령은 해임건의안 두 건 모두에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했고, 정국은 또다시 얼어붙었다.
여야는 저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항변한다. 야당은 정부와 더 강하게 싸워야 한다는 지지층 요구를 외면할 수 없고, 정부·여당도 야당 공세에 굴복해선 안 된다는 지지층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총선이 1년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여야 모두 벼랑 끝에 내몰리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럴수록 ‘혐오의 대결’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 지금처럼 양극단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다간 결국 중도층 민심을 다 잃어버릴 것이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우리 정치권이 쓸 다음 ‘헌정사 최초 기록’은 부디 상생과 신뢰의 기록이었으면 한다.
최승욱 정치부 차장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