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과 중독의 시대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크게! 현대인은 삶의 모든 순간에 유혹에 자극받는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다. 쏟아지는 광고들, 밀려드는 알림 문자들, 자극적인 게시물들이 욕망을 부추기고, 더 많이 경험하고 소비하며 누리고 성취하는 최대치의 삶을 찬양한다. 유한한 인생이기에 바라는 모든 걸 이룩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인간은 약한 존재다. 쉽게 유혹당하고, 간단히 빠져들며, 빠르게 중독된다. 마약이나 알코올 같은 물질에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다. 행하면 쾌락을 일으키고 멈추면 고통을 가져다주는 행위에도 중독이 된다. 도박, 게임, 유튜브, 소셜미디어, 소비 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눈앞에 다가선 행복의 약속, 손안에서 반짝이는 쾌락의 기회를 좇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산으로 가 있기 쉽다.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려다 자아를 잃는다면 얼마나 분하고 슬픈가.
‘절제의 기술’(다산초당 펴냄)에서 덴마크 심리학자 스벤 브링크만은 남들보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이 이루려 하기보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천천히 하면서 더 적게 성취하는 쪽이 좋은 삶의 길이라고 말한다.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정보와 유혹에 일일이 반응할 때 우리의 자아는 산산이 흩어진다. 더 많은 걸 얻으려 애쓸수록 우리 정신은 중심을 잃고 파편화한다. 늘 바쁘고 분주하다고 잘사는 건 아니다. 단단한 삶은 정말 중요한 몇 가지를 선택하고 거기에 지속해서 마음을 쓰는 힘, 즉 절제에서 만들어진다.
일찍이 솔로몬은 말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물이다.” 이때 ‘지키다’라는 말은 희랍어로 엔크라테이아(enkrateia)라 한다. 엔(en-)은 ‘~아래’, 크라테이아(krateia)는 ‘능력’을 뜻한다. 엔크라테이아는 쾌락 또는 욕구를 다스리는 내적 능력, 즉 금욕을 의미한다. 금욕할 줄 아는 사람은 유혹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다. 누구나 금욕의 문턱을 넘어서야 절제의 미덕을 얻는다.
절제는 금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절제는 바람직한 욕구는 기꺼이 좇고, 그릇된 일을 힘써 피하도록 자신을 단련할 때 생겨나는 힘이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은 추구하되 적절히 멈출 줄 안다. 욕망하되 최대가 아니라 최선에 집중한다. 절제는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 지속해서 번영하는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하다.
무절제한 사람은 반대로 행동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무절제를 “자발적으로 그릇된 원칙을 따르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자발적이기에 그는 가장 미약한 욕망에도 기꺼이 빠져들고, 나쁜 행위에서 오히려 기쁨을 얻는다. 절제와 마찬가지로 무절제도 적극적 능동적 행위다. 따라서 무절제한 사람은 자기 파멸에 이르러도 만족할 뿐 후회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무절제 사회다.
자극적 유혹에 삶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무절제 사회에서 좋은 삶을 살려면 절제가 필요하다. 브링크만은 유혹의 시대를 이기는 다섯 가지 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선택지를 줄여서 무한 욕망을 창출하는 우리 내부의 쾌락 쳇바퀴를 멈추게 할 것. 둘째, 진짜 원하는 하나만 바라고 거기에 집중하면서 다른 것은 놓아 버릴 것. 셋째,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인간다운 삶을 누릴 것. 넷째, 단순하게 살면서 공동체 복리에 인생 초점을 맞출 것. 다섯째, 기쁜 마음으로 뒤처져 약간의 부족함을 즐길 것.
절제는 단순히 욕망을 참는 게 아니라 마음을 지켜서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온전히 헌신하는 일이다. 유혹을 무찌르고 욕망을 절제하면서 주어진 시간을 더 의미 있는 일에 쏟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된다. ‘더 빨리, 더 많이’가 아니라 ‘더 적게, 더 집중해서, 더 철저하게’, 이것이 좋은 삶의 모토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