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법 기술자, 종교 기술자

입력 2023-02-21 03:03

‘법 기술자’라는 말이 최근 들어 자주 신문 지면에 오르내린다. 법 지식을 이용해 자의적으로 재판하는 법조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버스요금통에서 400원씩 두 번, 합계 800원을 빼내어 커피를 사 마신 운전기사에게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하고 50억원을 퇴직금으로 받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들이 모두 법적 근거를 가진 정당한 판결이라는 데서 우리는 절망한다.

법 기술자는 영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다. 굳이 비슷한 단어를 찾자면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즉 기술관료를 들 수 있다. 정부 각 분야의 정책을 결정하는 전문기술자, 경제전문가, 법조인, 정치공학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술관료는 객관적 자료를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놓치는 게 있는데 바로 사람이다. 약탈적 기업합병으로 해고되는 직원들의 아픔이나 고물가로 고통받는 서민은 안중에 없다. 그럼에도 테크노크라트에게 불변의 원칙 한 가지가 있다. 자기나 자기가 속한 그룹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지배하는 무자비한 기계적 사회를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너도 법 기술자나 테크노크라트와 다르지 않은 설교 기술자, 종교 기술자 아니냐.” 생각해 보니 기술자 맞다. 거의 40년 동안 설교해 왔으니 설교에는 이골이 났다. 성경 본문을 익숙하게 다루고 어렵지 않게 눈높이에 맞게 해설하고 당황하지 않고 전달한다. 수십 년간 개혁신학을 공부했으니 설교가 이단 사설로 빠질 리는 없다. 설교 후 부를 찬송과 감동을 줄 음성 및 표정도 저절로 떠오른다.

자기를 전문인으로 생각하며 엘리트 행세하는 것도, 성도의 상황에 너무 깊이 참여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점도 테크노크라트를 닮았다. 법 기술자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성경 해석과 설교를 피하는 기술을 체득했다. 대한민국을 잔인하고 피곤한 사회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고 통곡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바른 신학을 위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도와 말씀 묵상과 시련이다. 이것들은 루터 시대 신학자뿐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덕목들이다. 기도와 말씀 묵상은 이해하겠는데 시련은 왜 필요한가. 시련은 시험 유혹 번민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다. 루터에 따르면 진정한 신학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시험당해야 한다. 의심과 번민에 휩싸여야 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규모 7.8의 강진은 어린 자식을 폐허 더미에 묻은 어미들의 통곡이며 막막한 세월을 홀로 살아야 하는 남은 자들의 한숨이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라면 전염병과 전쟁과 지진은 어디서 온 것인가. 정의의 촛불을 앞세운 명예혁명, 피를 부르는 극단적 분열, 춤추는 유튜브, 광기 어린 탐욕,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손을 맞잡고 죽은 세 모녀, 그리고 사회적 신뢰를 잃고 내리막길을 걷는 무기력한 교회. “네가 찾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귓가에 들려오는 유혹의 목소리, 번민과 회의 가득한 불면의 밤이 진정한 신학의 시작이다. 종교 기술자는 결코 이런 위험에 직면하는 법이 없다.

이 시련을 경험한 자의 ‘기도’는 세상과 자기에 대해 절망한 자가 깊은 곳에서의 구원을 바라는 절박함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의 ‘말씀 묵상’은 살아 있는 말씀이 방망이가 되어 그의 영혼을 산산이 부수는 경험, 그리고 폐허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을 의미한다.

2023년 평화가 사라진 사순절, 입술을 티끌에 대고 잠잠히 엎드려 그의 도우심을 구하자.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는 잔기술을 내려놓자.

장동민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