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어그레시브하게 깐죽대는 언어

입력 2023-02-20 04:08

국민의힘 전당대회 예비경선을 통과한 이준석계 4인방은 지난 7일 비전 발표회 때 공약을 한자로 적은 족자를 들고 와서 펼쳤다. 젊은 후보들이 시선을 끌기 위해 택한 복고풍인데, 일부 한자가 틀렸다. ‘공천 자격고사 의무화’ 중 자격(資格)을 自格으로, ‘전당대회 비용보전’ 중 보전(補塡)을 保全으로 잘못 썼다. 망신스러운 일이지만, 틀린 것을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인지 그냥 넘어갔다. 나도 몰랐었다가 페이스북에서 번역가 신견식씨가 지적한 걸 보고 그제야 알게 됐다. 이 해프닝은 젊은 정치인이 한자를 쓰는 게 튀는 행동이 됐고, 그렇게 튀려고 작정해도 한자 사용에 서툴며, 틀리게 써도 거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려운 한자어나 사자성어를 써서 유식함을 과시하는 일은 확실히 한물갔다. 정치인이 자신의 심정이나 정세 평가를 사자성어로 표현하거나, 교수신문이 한 해 우리 사회의 특징적 면모를 나타내는 사자성어를 뽑는 건 이제 멋도 재미도 없다. 문재인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만든 포럼 ‘사의재(四宜齋)’의 작명을 두고도 “뜻을 알아먹을 사람도 없는데 운동권 엘리트 티 내냐”는 비판이 나왔다.

한자가 있던 자리에는 영어가 들어왔다. 기사에서 어떤 단어의 뜻을 분명하게 하려고 괄호치고 한자를 넣을 때, 아무도 모를 한자를 쓰느니 차라리 영어를 넣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다. 이를테면 ‘명징(明徵)하다’를 ‘명징(clear)하다’로 쓰는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도 영어 사용을 무척 즐긴다. “아주 어그레시브(aggressive)하게 뛰어봅시다”(윤석열 대통령) “어프로치(approach)가 좀 마일드(mild)한 것 같아요”(한덕수 총리)라는 식으로 영어를 과하게 섞어 쓴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가 쓴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보면 달라진 것은 한자 사용만이 아니다. 이 책은 제목대로 요즘 각종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볼 영화·드라마는 넘쳐나는데, 시간이 없고 투입하는 에너지도 아까워서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내용이다. 매체 환경 등 사회의 여러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행태도 달라졌다. 어렵고 복잡한 콘텐츠를 진득하게 보면서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사 없는 장면, 등장인물의 침묵도 견디지 못한다.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내용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어든, 이해하기 쉬운 것이 대접받는 세상”이 됐다.

“관객이 유치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더 편한 것만 추구하죠. 그냥 분명하게 보여 달라는 겁니다. 이해를 못하는 게 자기 탓은 아니길 바라는 거죠. 시대적으로 ‘노력’이란 말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해요.”(영화제작자 마키 타로)

참고 견디는 대신, 휙휙 넘기며 내가 공감하고 좋아하는 것만 취한다. 공감이 잘 안 되는 생각을 마주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일은 꺼리고 내 생각을 보강해줄 이야기만 찾는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편협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얕은 감성’으로 ‘알기 쉬운 것’을 추구하니 정치판의 언어도 그러해진다. 실제 독재와 거리가 멀어도 ‘검사 독재’로, 진짜 참사가 아니어도 ‘외교 참사’로 뭐든 독하고 강하게 표현한다. 말의 품격도 추락 중이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나온 “장관, 참기름 들기름 안 먹고 아주까리기름 먹어요? 왜 이렇게 깐죽대요”(정청래 의원)라는 질문은 품격의 바닥을 보여준다.

그래도 별수 없다. 대중의 변화된 습성과 수준에 정치가 맞춰가는 것일 뿐,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거룩한 얘기를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