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산케이, 그게 질문인가

입력 2023-02-20 04:06 수정 2023-02-20 17:05

지난 16일 서울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 풀기자로 간 나는 일본 산케이신문 기자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에게 던진 질문을 받아치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산케이 기자는 할머니에게 “원고(피해자) 중 일부는 일본의 사죄가 없더라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 재단의 돈을 받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답변을 바라고 한 질문인가. 할머니 입에서 그 사람들을 비난이라도 하는 듯한 답변을 원했나. 아니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할머니를 고집불통처럼 보이게 몰아가려고 했던 것인가.

할머니는 간담회에서 “잘못한 놈들은 따로 있다”면서 한국 기업이 낸 기부금이 아닌 자신이 건 소송에서 패한 미쓰비시로부터 직접 배상금을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럼 그걸로 할머니의 의사 표시는 끝났다. 의사소통도 쉽지 않은 할머니에게 굳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전형적인 갈라치기였다.

강제징용 문제에 피로도가 쌓였던 나도 내심 할머니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할머니 한 분 때문에 배상을 받고자 하는 다른 피해자들은 그간 한마디도 못 했던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일본 언론, 그것도 극우의 대명사인 산케이가 하니 불쾌했다. 지금 돌아가는 판이 얼마나 이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했는가 싶었다.

강제징용 문제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가 딱 이렇다. 일본 전범기업의 사죄와 피해배상 참여 중 하나 정도는 고려해볼 법도 한데 한 개도 내놓지 않는다. 왜. 한국이 더 급하니까.

그럼 우린 왜 급해야 하나. 한·미·일 3국의 안보 협력을 위해? 그건 당장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지 않더라도 미국 때문에라도 된다. 일본과 사이가 좋아지면 협력이 좀 더 수월해질 뿐이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일본과 정보 교류가 안 되는 게 아니다. 단지 정보란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북한이 일본 머리 위로 미사일을 쏘는 상황에서 정보에 더 목마른 건 일본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를 풀기 위해? 수출 규제로 불편한 건 우리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자기네가 건 수출 규제를 자기네 언론들이 해제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실정이다.

최악으로 치달은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정부의 ‘선의’가 최근 들어선 조금 의심스럽다. 강제징용 해법을 2월 말에 맞춰 내려고 한다는 얘기가 자꾸 돌아서다. 정부 관계자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3·1절 경축사가 첫 경축사이지 않느냐”고 했다. 그만큼 기념비적인 의미가 담겨야 한다는 얘긴데 그게 강제징용 해법이다.

외교부는 2월 28일에 피해자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놓고 피해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 그 전에라도 보자고 재촉했다고 한다. 정부의 시계는 피해자들에게 맞춰져 있는 게 맞는가. 정부는 일본 측 사죄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이미 ‘김대중-오부치 선언 계승’을 사실상 사죄로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해 더 이상의 진전은 힘들어 보인다.

지금 강제징용 문제는 일본의 사죄를 받느냐 마냐 하는 역사적 영역보다 일본 전범기업 국내 재산에 대한 피해자들의 채권을 없애냐 마냐 하는 사법적 영역이 더 화두다. 지금까지 한 번도 피해자 대리인들에게 공감한 적이 없었는데 이 말은 와닿았다.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승소채권을 어떻게 소멸시킬지 검토하는 것이다.” 양금덕 할머니는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할머니의 채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박 장관이 18일 일본 외무상을 만나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고 하니 일말의 여지를 기대해본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는 시기가 언제든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정부 안팎에선 해법 발표 이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온다. 한국이 내놓은 해법에 일본이 기꺼이 화답하고, 경제·안보 등 양국 협력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야 이 문제를 이렇게까지 밀어붙인 명분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김영선 정치부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