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에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이 국가안보에 위해가 되는 행위를 한 사람을 조사하기 위해 만든 대공분실 가운데 하나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인사를 불법적으로 체포해 취조·고문한 곳으로, 1985년 김근태 고문 사건과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세간에 많이 알려졌다.
1976년 완공된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다가 경찰의 과거사 청산 사업으로 경찰청인권센터가 됐다. 그리고 2018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행정안전부로 관리권을 위임받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2024년 정식개관할 예정이다.
악명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는 다름 아닌 ‘20세기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1931~1986)이다. 김수근이 1970~80년대 국가 폭력의 상징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17~26일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연극 ‘미궁의 설계자’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둘러싼 김수근의 과오와 시대적 딜레마를 다뤘다.
극작가 김민정과 연출가 안경모가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엮인 세 인물과 그에 따른 세 개의 시선을 그리고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에 참여한 김수근 건축사무소 소속 신호의 197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와 고문당한 경수의 1986년, 민주인권기념관이 된 남영동 대공분실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나은의 2020년 이야기가 교차한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김민정과 안경모를 만나 이번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수근의 과오와 시대적 딜레마
극작가 김민정은 2004년 ‘가족 왈츠’를 통해 연극계에 데뷔한 후 영화의 원작이 된 ‘해무’를 비롯해 ‘너의 왼손’ ‘하나코’ ‘짐승의 시간’ 등 근현대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희곡을 주로 써왔다. 진중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로 호평을 받아온 그는 2021년 ‘오늘의 극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궁의 설계자’는 이번 작품의 드라마투르그를 맡은 연출가 이은기의 권유가 있었다.
“제가 2020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초연한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의 대본을 썼습니다. 그때도 드라마투르그였던 이은기 선생님에게 건축가 소재 희곡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자 김수근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평소 존경하던 김수근 건축가가 끔찍한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번 작품을 썼습니다.”(김민정)
연출가 안경모는 1997년 뮤지컬 ‘X라는 아이에 대한 임상학적 보고서’로 데뷔한 이후 연극을 중심으로 무용, 뮤지컬, 전통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텍스트를 존중하면서도 무대를 섬세하게 이미지화시켜내는 연출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21년에는 연극 ‘스웨트’로 김상열 연극상을 받기도 했다. 김민정 작가와는 ‘해무’ ‘길삼봉뎐’ ‘바람불어 별이 흔들릴 때’에 이어 네 번째 작업이다.
“김민정 작가는 어떤 사안을 포착한 뒤 그 안의 인간을 세밀하게 해부하는 뷰파인더를 가지고 있어요. 이번 작품만 보더라도 단순히 김수근의 과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한계 속에서 김수근 등 지식인의 행위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우리에게 역사의 과오를 어떻게 반성하고 책임질 것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안경모)
남영동 대공분실에 드러난 김수근 건축 특징
김수근은 김중업(1922~1988)과 함께 1세대 건축가로서 수많은 건축물을 설계했으며 건축사무소 ‘공간’을 통해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런데, 김수근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사실은 2005년 경찰청인권센터로 바뀌면서 드러났다. 사실 검은 벽돌을 사용하면서 사각 창을 외부로 돌출시켜 입체감을 주거나 내부에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는 등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적 특징은 1973년 원서동에 지어진 공간 사옥과 여러모로 닮았다. 또한, 내부의 공간 분할 역시 ‘미궁’을 연상시키는 김수근 건축의 특징이 드러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독재정권 시절 겉으로는 ‘국제해양연구소’로 위장됐습니다. 이런 특수 목적 건물의 경우 설계자나 시공사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김수근과의 관련성을 오랫동안 알 수 없었죠. 공간 건축사무소 홈페이지의 김수근 연보를 보면 남영동 대공분실을 빼는 등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김수근이 고문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설계도면을 보면 잘 나타나죠. 그리고, 1983년 원래 5층이던 건물을 7층으로 증축할 때 사용한 설계도에는 공간 건축사무소의 직인도 찍혀 있습니다.”(안경모)
남영동 대공분실의 조사실은 5층에 있었는데, 밖에서 보면 유독 5층의 창문들만 좁고 길게 되어 있다. 고문에 시달리던 피해자들의 탈출이나 자해를 막기 위해 머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민주인권기념관은 경찰이 2000년대 박종철이 고문받은 509호를 제외하고 모두 리모델링했던 것을 다시 복원함으로써 남영동 대공분실의 처참함과 함께 인권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릴 계획이다.
라이벌 김중업은 정권 비판하다 프랑스 추방
“저는 민주인권기념관 공사 직전에 건물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어요. 이곳에 많은 분이 끌려와 고문으로 고통받거나 죽음에 이르렀던 사실에 숙연해지더군요. 당시 가이드와 함께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한 509호를 보면서 이번 작품을 구상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509호’였고, ‘미궁의 설계자’는 부제였어요.”(김민정)
김수근이 독재정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적은 없다. 하지만 1970년대 김종필 총리, 김현옥 서울시장과 친하게 지내며 각종 국책 사업을 맡은 것은 물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라는 국영기업체의 사장으로 재직했다는 점에서 그가 독재정권과 ‘결탁’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라이벌이던 김중업이 당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가 프랑스로 추방된 것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김수근의 건축은 국가 권력을 유지하는 하나의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된 결과”라는 게 김민정과 안경모의 공통된 지적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연극이 공연되는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은 김수근이 부지를 기부하고 직접 설계한 건물이다. 김수근이 시도한 붉은 벽돌 건물 시리즈의 원조로 내부에는 특유의 나선형 계단이 있다. ‘미궁의 설계자’는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이 희망하면 나선형 계단을 통해 퇴장하게 할 예정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눈을 가린 채 조사실로 끌려가던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게 하려는 취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