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요구하는 경험

입력 2023-02-17 04:03

시조카가 태어났다. 조리원에서 막 나온 동서와 아기를 보러 집에 가니 알록달록한 아기용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2023년생 갓난아기는 부모를 알아보고, 세상을 인식하고, 걷고 뛰고, 그리고 원하는 걸 요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기저귀를 갈아 달라고,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다가 어느덧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학원에 보내 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다 철이 들 즈음이 되면 차츰 눈치도 보고 사정도 살피게 된다. 요구하는 일 대신 스스로 하는 일로 일상을 메울 것이다. 적어도 기존 세대인 우리 시대는 그랬다. 그래서 어른이 돼 일상에서 요구하는 일이라곤 커피 전문점에서 인터넷 주문 꿀팁을 토대로 바닐라 시럽을 추가하는 것 정도에 그치곤 한다. 그런데 이 아기가 살아갈 시대는 좀 다를 것 같다. 더 적극적으로 요구를 표현해야 하는 시대가 와버렸으니 말이다. 챗GPT 이야기다.

우리는 이 회색빛 화면 앞에 앉아 빈칸에 무언가를 채워 말을 해야 한다. 되는대로 우습게 시비를 걸어보고, 침착하게 대답을 하는 인공지능(AI) 기술에 감탄을 한다. 점차 이걸 써 봐라, 저걸 추천해 봐라 말을 건다. 체력의 한계 없이 무한하게 답을 뱉는 기술을 보면서 정말 대통령 신년사도 거뜬히 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내 생활 속에 이 프롬프트를 녹여내는 일은 마냥 쉽지만은 않다. 무얼 요구해야 할지도 막막하다. 겨우 AI와 대화할 구실, 그러니까 목적을 설정한다. 어떻게 문장을 써야 내 뜻이 전해질까? 러브레터를 쓰는 마음으로, 오해 없이 정확한 표현을 향해 질주한다! 그사이 오픈채팅방에서는 챗GPT에 말 잘하는 법과 효과 좋은 문장들이 치트키처럼 공유된다.

한동안은 요구를 하는 경험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기술이 더욱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내가 원하는 것을 말로 잘 표현해내는 것이 중요해졌으니 말이다. 그 간극을 뛰어넘을 장치가 나올 수 있을까? 요구를 많이 해 봤는지 그 경험을 묻는 세상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유재연 옐로우독 AI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