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보다 짧지만 강렬하고 다채로운 소설의 맛

입력 2023-02-16 20:56

소설가 구병모(47)는 산문에 자신이 없어서 신문 칼럼도 사양한다고 한다. 두 해 전에는 에세이 청탁을 받고 짧은 소설을 대신 보낸 적도 있다고. 그 작품이 투명인간 이야기를 다룬 ‘누더기 얼굴’이다.

‘로렘 입숨의 책’은 구병모가 쓴 미니픽션들을 묶은 책이다. 통상적인 단편소설 분량에는 미달하는, 원고지 50매 안팎의 소설 13편이 수록됐는데 ‘짧은 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그 맛이라면 경쾌함과 속도감, 소재나 문체에서의 상대적 자유 같은 것일 것이다. 구병모는 이런 요소들을 한껏 활용해 짧고 강렬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꿈을 사는 이상한 매몽가와 그에게 꿈을 파는 가난한 청년이 등장하는 ‘영 원의 꿈’은 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작가가 좀더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데 미니픽션이 꽤나 유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구병모는 전형적인 소설 형식으로는 하지 못했던 실험들을 짧은 소설에서 시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연결 짓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는 작가의 고백을 들려주는 ‘동사를 가질 권리’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 뒤에 붙은 후기에서 작가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설을 오래도록 간절히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구병모 미니픽션집은 짧은 소설의 매력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짧은 소설을 소품이나 한계 정도로 바라보는 시선에 도전한다.

김남중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