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내리는 커피] 이범진의 부끄러움

입력 2023-02-18 04:03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자들을 돕자는 구호 활동이 활발하다. 역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896년 11월 남미 에콰도르 커피 항구에서 화재가 발생해 가옥이 잇달아 불탔다. 죽은 사람이 거의 100명이고, 집을 잃은 사람은 3만여명이나 됐다. 소식을 들은 미국 주재 각국 공사관들은 차례차례 원조에 참여했다. 그러나 주미조선공사관은 공사관 운영 경비도 부족해 참여하지 못했다. 원조 참여를 요청하는 각국 공사들이 연명한 편지를 받아본 주미공사 이범진은 조선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다른 나라 공사들이 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나도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고 1896년 11월 21일자 일기에 썼다. 가난한 나라 외교관의 부끄러움이었다.

11월 24일 이범진은 또다시 부끄러운 마음을 기록했다. 미국 관리와 학자, 각국 사신에 이르기까지 매번 만날 때마다 조선이 국장을 아직 행하지 않은 이유와 군주께서 왜 궁궐로 돌아가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많이 물으나 “대답할 말이 없으니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가슴에 교차한다”고 썼다. 국모의 국장을 못 치르고, 남의 나라 공관으로 군주가 피신해 있는 약한 나라 외교관의 부끄러움이었다.

1897년 새해가 밝았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취임을 앞두고 있었기에 각국 공사들이 앞다퉈 다회를 연다고 초청장을 보내왔다. 가지 않으면 외교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간다면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겠지만 사례하는 다회를 열 형편이 못 됐다. 부끄러웠다. 1897년 1월 12일에 쓴 일기에서 이범진은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가는 것도 난처하고 가지 않는 것도 난처했던, 가난하나 품위는 유지하려던 나라 외교관의 부끄러움이었다.

120여년이 지난 오늘 이범진이 남긴 일기를 읽고 있자니 이범진이 느꼈을 부끄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셔도 갚아야 하는 것이 외교관이다. 그것이 어려울 때의 수치심은 차마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외교관은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러움을 넘어서야 하는 자리다. 이범진은 어떤 방법으로 부끄러움을 넘어서려 했을까? 잘사는 일, 즉 웰빙이었다. 조선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청나라, 조선 지배를 꿈꾸던 러시아, 지배 야욕을 위해 이웃 나라 국모를 살상한 일본에 복수하는 길은 웰빙이었다.

이범진이 미국으로부터 배우고 싶었던 웰빙으로 가는 방법의 하나가 교육이었다. 공사관 주변에서 아침마다 남녀 아동들이 옷을 차려입고 책을 끼고 학교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문명으로 진보하는 풍속이 날로 상승하니 부러운 마음이 든다”고 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가 미국 공사의 직을 마치고 러시아 공사직을 수행하던 중 조선의 외교권은 사라졌고, 그는 직에서 해임됐다. 귀국을 포기하고 러시아에 머무르던 중 나라가 망했다. 부끄러움을 알던 이범진은 자결로 생을 마감했고, 헤이그밀사 3인의 한 명이었던 그의 아들 이위종은 독립운동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으로 가득찬 이범진의 일기 ‘미사일록’(푸른역사)이 번역 출판됐다. 반가운 일이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과 교수 leegs@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