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과 영남의 경계를 이루는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해발 1614m)은 남한의 산 중에서 네번째 높다. 산의 덩치가 크다 보니 남쪽으로 약 15㎞ 떨어져 우뚝 솟은 봉우리를 남덕유산(1507m)으로 따로 부르고 있다. 향적봉은 백두대간에서 벗어나 지만 남덕유산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분수령이다.
남덕유산은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거창군에 걸쳐 있다. 사시사철 풍광이 빼어나지만 남덕유산의 묘미는 겨울에 있다. 순백의 눈꽃·서리꽃이 코발트 빛 하늘과 붉은색 겨울나무 군락과 어우러져 잊지 못할 절경으로 기억을 수놓는다. 이 풍광은 3월 말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남덕유산 눈꽃 산행은 대체로 영각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다. 영각재에 오르면 날을 세워 불어대는 칼바람이 볼을 얼얼하게 한다. 바람이 거셀수록 나뭇가지에 서리꽃을 빚어내니 오히려 반갑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달라붙은 설화와 상고대는 푸른 바다의 산호초를 닮았다. 정상에 서면 덕유산의 장쾌한 백두대간 마루금과 주변 풍광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정상 너머 헬기장 같은 넓은 공간에서 삿갓봉을 지나 거창군 북상면 황점으로 내려서는 코스가 선호된다. 원점회귀하려면 왼쪽 육십령 방향으로 내려서 서봉(1492m)을 지난다. 서봉은 장수 덕유산으로도 불린다.
육십령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해발 730m로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뻗어 내려온 할미봉과 영취산 깃대봉을 잇는 고갯마루다.
육십령에는 이름과 관련한 세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고개가 안의 감영에서 60리, 장수 감영에서 60리 떨어져 있어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가는 탓에 육십령으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다. 셋째는 전설과 관련이 깊다. 옛날 산적들이 많아서 고개를 넘는 사람이 재물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산 아래 주막에서 며칠씩 묵으며 장정 육십명이 모이면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한 뒤 떼를 지어 넘었던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산적들을 피해 내려와 이룬 마을이라 해서 피적래(避賊來)인 마을이 지금도 서상면에 있다.
육십령 북쪽에 암봉인 할미봉(1026m)이 솟아 있다. 자체의 매력과 인근 3형제바위, 대포바위를 품고 있어 산행객들의 발길을 불러들이고 있다. 2.6m 높이의 대포바위는 남근석을 닮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친 왜군이 전주로 진출할 때 이곳에서 큰 대포를 만나 우회하는 바람에 장수군 장계면이 화를 면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백제권으로 인식됐던 장계면에 삼봉리 가야 고분군이 있다. 가야시대 석곽묘가 다량으로 확인됐다. 석곽묘 내부에서는 가야 무덤 중에서도 왕릉급 수장층 묘제에서 주로 확인되는 꺾쇠(목관 결박을 위해 ‘ㄷ’자로 구부러진 못)를 비롯해 뱀 문양 장식 토기편, 유개장경호(뚜껑이 있는 목이 긴 항아리), 뚜껑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하지만 ‘장수가야’는 아직 학계에서 공인받지는 못하고 있다.
장계면에는 논개의 생가지도 있다. 논개의 호는 의암, 성은 주씨, 본관은 신안이다. 장계면 주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인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논개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갈 곳이 없어지자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의 배려로 장수 관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살 수 있게 됐다. 최경회는 부인 김씨 사망 후 논개와 부부의 예를 올렸다.
임진왜란 때 최경회는 의병장이 돼 큰 전과를 올렸다. 진주성 전투의 승리 때 큰 공을 세워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돼 진주성에 입성했다. 논개도 남편의 뒤를 따라 갔으나 진주성은 왜군에 함락되고 남편은 순국했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촉석루에서 열린 일본군의 승전잔치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순국했다.
논개의 묘는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 높게 돋워진 구릉 위에 있다. 77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앞에 논개의 묘가, 뒤편에 최경회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여행메모
서상IC 인근 영각사 ‘남덕유산 들머리’
논개 태어난 주촌마을에 한옥숙박단지
서상IC 인근 영각사 ‘남덕유산 들머리’
논개 태어난 주촌마을에 한옥숙박단지
남덕유산 영각탐방지원센터는 통영대전고속도로 서상나들목에서 가깝다. 26번 국도를 따라 중남삼거리까지 간 다음 우회전해 덕유산국립공원 이정표 방향 37번 지방도로를 탄다. 약 5㎞를 가면 영각사주차장이 나온다. 입장료와 주차장은 없다.
영각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잡아 정상까지 3.4㎞지만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서봉쪽으로 원점회귀하면 약 11.5㎞로, 6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할미봉은 육십령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다. 눈에 대비한 장비를 필히 챙겨야 한다.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장계면 삼봉리 산 108-1'에 있다. 바로 옆으로 익산장수고속도로가 지난다. 장계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육십령쪽으로 4㎞쯤 달리다 오동, 대곡의 군도를 3.5㎞쯤 가면 깊숙한 산골에 자리한 논개생가와 주촌마을이 나온다. 주촌마을에는 목재와 황토를 이용해 총 4개 단지 21객실을 갖춘 한옥숙박단지가 있다. 논개 생가 뒤편에 역사뿐 아니라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는 도깨비전시관도 위치해 있다.
장수·함양=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