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에 구멍이 났다. 아침에 샤워를 하고 팬티를 입으려고 보니 구멍이 난 것이다. 한참이나 팬티를 들고 서 있었다. 구멍 난 팬티와 이제 정말 작별을 하려니 서운한 마음까지 밀려든다. 사실 구멍이 날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구멍이라는 게 찢어지는 것과는 달라 하루아침에 뻥 뚫리는 게 아니니까. 서랍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색깔별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들이 그득한데, 어느 중년 여자의 탄력 없이 늘어난 볼살처럼 처량해 보이는, 고무줄 늘어나고 아슬아슬하게 구멍 나기 직전의 그 팬티를 나는 또 꿰어 입는 것이다.
“내가 오늘 죽어도, 뭐 교통사고 당해 죽든 강도당해 죽든 병원에 실려가서 빨개 벗겨놔도 절대로 기죽지 않게 비싼 팬티 사 입어.” 인생드라마로 꼽는 ‘나의 아저씨’를 단 한 편도 본 적 없지만 어느 술자리에서 친구가 읊어준 이 대사는 잊지 못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오늘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으면 내 구멍 난 팬티를 누군가 보겠구나. 그래서 부끄럽나? 아니 난 그래도 괜찮았다. 구멍 난 팬티가 뭐 어때서. 그리고 이미 죽어버렸는데 어때서.
무엇이든 오래된 것이 좋다. 구멍 나 버린 팬티처럼 망가져서 제 기능을 못할 때까지 써야, 그제야 헤어질 결심을 한다. 내 오래된 자동차, 내 오래된 옷과 가방들, 내 오래된 책상. 또 하나, 이상한 집착이 있다. 비닐을 버리지 못한다. 쿠팡 로켓 배송 비닐부터 택배 상자 안의 다양한 비닐, 그리고 배달 음식의 포장 비닐까지 찬장 가득 모아둔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나 물건을 담을 때 그 비닐을 꺼내 다시 쓴다.
이런 성향은 당연히 다른 곳으로도 확장이 되는데, 요즘 연일 집마다 성적표처럼 공개하는 도시가스비와 전기요금 얘기다. 800만원 가까이 찍힌 전기 고지서를 들고 생업을 포기해야 하나 망연자실한 어느 화훼농가 주인의 인터뷰를 보며 정부의 에너지정책을 비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건 비단 일터의 문제만이 아니다. 겨울을 나고 있는 가정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1989년에 지어져 올해 34살이 된 오래된 아파트에 작년 7월 이사를 했다. 고층으로 올린 새 아파트 단지보다 페인트가 바래가는 아파트 벽들, ‘시니어클럽’이라는 말보다 정감 있는 ‘경로당’이라 쓰여진 나무 간판, 그리고 아파트 나이만큼 커져버린 고목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나는 더 좋았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오래된 아파트의 웃풍이었다. 베란다 확장까지 한 집이라 겨울엔 춥지 않으려나. 그리고 이제 첫 겨울을 보내고 있다.
32평 아파트 1월 가스비 고지료 8만원, 전기료 5만원. 이 나이 먹은 아파트와 함께 받은 성적표다. 평상시에는 외출모드를 해두고, 얇은 옷을 겹쳐 입고, 전기난로도 같이 사용하면서 온도를 유지했다. 아, 선물 받은 뜨거운 물주머니가 꽤나 유용했다. 배가 따뜻하니 온몸이 훈훈한 효과가 있다. 기특하게도 오래된 아파트는 연일 계속되는 한파 속에서도 잘 버티고 있다. 인터넷에는 온갖 난방비 절약 팁들로 가득한데, 급탕료를 줄이는 것도 효과가 있단다. 보일러를 살펴보니 온수 온도가 가장 뜨겁게 맞춰져 있길래 온도를 중간 정도로 낮춰 조정해 두었다.
가끔 이게 무슨 지지리 궁상인가 흠칫 놀라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부모님은 늘 부족하지 않게 돌봐주셨지만, 아끼는 습관은 몸에 배어 있는 분들이었다. 식사하고 난 뒤 티슈 하나를 뽑아 반을 나눠 주시면서 “아낄 수 있는 건 아끼고, 좋은 데 가서 친구에게 한턱 내는 건 아까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생각해보니 자연스레 지금 난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에너지는 전 지구적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에너지 전쟁에서 가장 약자다. 당장 우리집 고지서 폭탄을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출근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기가 훈훈하다. 어제 마지막 퇴근자가 시스템 난방기를 끄지 않아 밤새 돌아간 걸 생각하니 아까워 죽겠다. 회사 직원들에게 전체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하면서 전기와 난방기 한 번 더 돌아보자구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