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튀르키예 지진은 예사롭지 않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엄청난 데다 두 차례의 독립된 강진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부터가 지질학적으로 전례 없는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우크라이나 전쟁, 세계적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에 이은 네 번째 격변이다. 순차로 닥치는 재앙이라기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태라는 것이 특이하다. 영국 BBC방송이 이번 지진 이후 참상을 ‘아마겟돈 전쟁’ 같다고 표현한 것 자체가 묵시록적이다. 시리아 지역 이재민들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외친 것도 예사롭지 않다. 더욱이 강추위에 전염병 창궐 위험, 특히 지진으로 인한 보급의 어려움으로 식량과 물의 공급이 제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100만여명에 달하는 이재민의 생존이 매우 위태로울 수 있어 2차 참사라는 더 큰 비극까지 예고하고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7억명에 가까운 인구를 가진 이슬람 제국이다. 여기에 크리스천은 2~3% 정도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조용히 일어난 부흥의 역사로 실제는 10%에 달한다. 중동에서 국토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은 3개국은 이집트 이란 튀르키예이다. 이집트에는 비교적 성경적인 1000만 콥트정교회 성도들이 있고 개신교인도 100만명을 넘어섰다. 아랍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대부분 이집트 출신들이다. 이란에서 최근 일어난 부흥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러 자료 등을 종합해보면 지하 교회 성도는 대략 700만명에 달한다. 최근 이란 종교 조사에서 시아파 무슬림을 고수하는 국민은 30%에 불과하다는 통계는 이미 이란이 무슬림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종교 자유가 있는 튀르키예는 지난 수십 년간 수천 명의 선교사가 복음을 전했는데도 현지인 성도는 전체 인구의 0.1%에 불과하다. 튀르키예를 갈 때마다 ‘아무리 태워도 타지 않는 장작처럼’ 복음의 수용도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튀르키예를 뒤흔든 충격적 지진 참사 소식을 접하면서 이 처절한 상황을 놓고 긍휼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버릴 수 없었던 희망은 이 고통과 절망의 땅, 복음의 불모지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는 것이었다.
한 나라에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그 열매로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려면 복음의 생태계가 조성돼야 하고 나름대로 타당성(Plausibility)이 있어야 한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경험은 물론 최근 일어난 인도 아프리카 브라질 인도네시아의 부흥은 경제 발전에 따른 가계 소득증대와 중산층의 획기적인 증가에 있다. 전 세계의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2022년 경제성장률이 8%를 웃돌며 초고속 경제 성장 국가가 됐다. 이는 인도에서 일어난 영적 대부흥, 획기적인 크리스천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근 추산된 인도의 기독교인 수는 최소한으로 잡아 1억명(7%)이고 일반적 추산으로는 1억5000만명(11%)에 달한다. 내부자 운동까지 포함해 최고 2억명으로 보는 견해도 나온다.
최근 인도를 방문하면서 전체 국민의 분위기가 매우 밝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인도네시아와 브라질, 아프리카 등 부흥의 현장에서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상황이 이런 데도 해당 정부의 공식 통계는 다소 억지스럽다. 인도 정부는 크리스천 비율을 3% 이하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실제 6000만명인 데도 그 절반인 3000만명으로 하향 조정해 발표하고 있다. 가톨릭 국가로 알려진 브라질의 경우도 현재 7000만명에 달하는 개신교인 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시 개신교의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대다수 중남미 국가 역시 마찬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도 이제는 옛날의 가난한 아프리카가 아니다. 아직도 빈부 차이가 심하기는 하지면 나라마다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는 상황을 고려하면 중산층의 증가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14억3000만명의 인도, 16억명의 아프리카, 2억8000만명의 인도네시아, 2억2000만명의 브라질에서 일어나는 영적 부흥은 이들에게 막스 베버의 논리처럼 성경만이 부의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윤리관과 세계관을 제공해 준다는 측면에서 중산층 증대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이 타당성의 논리이다.
또 하나의 가능한 논리는 고통과 핍박이 일으키는 영적 부흥이다. 중국의 부흥은 공산 통치에 따른 순교와 핍박의 열매이다. 이는 지금 북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부흥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란의 부흥은 이슬람 신정 통치의 절망감에서 나온 열매이다. 인도와 나이지리아의 부흥 역시 핍박과 순교의 열매이다. 아프리카의 부흥은 오랜 내전으로 인한 고통의 열매이다. 중남미와 필리핀 부흥은 메마른 로마가톨릭에 대한 반작용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화시킬 수 없는 복잡한 요인들이 존재하지만 크게 보면 부흥의 타당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필자는 조심스럽게 8500만명인구를 가진 튀르키예의 부흥을 예견하고 싶다. 이미 튀르키예에는 수많은 중산층이 존재하고 부에 대한 열망이 흘러넘친다. 여기에 이슬람의 율법적 접근은 이미 빛을 잃었고 많은 젊은이는 참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다. 물론 이슬람 부흥을 정치적 깃발로 내세운 에르도안 대통령의 철권통치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다. 이는 튀르키예에 갈 때마다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지는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터진 대참사는 이슬람 신앙을 계속 고수하는 튀르키예 내의 무슬림의 의식 변화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
합리적 세계관의 공백과 자연재해의 고통에 따른 정신적 압박과 중첩되는 이 시점이야말로 선교의 측면에서 복음의 황금기가 될 수 있다. 튀르키예의 무너진 들판에 영적 부흥을 통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는 절호의 기회이다. 지금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이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줄 때다. 더욱이 튀르키예는 한국 전쟁 때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져준 참전국으로 혈맹의 형제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모든 교회와 온 성도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튀르키예 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호소하고 싶다. 크리스천 형제들로 구성된 국제사랑의봉사단 긴급구호팀을 파송하며 안타까움과 희망이 반쯤 섞인 마음을 이렇게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