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과연 될까. 연금개혁 말이다. 연금개혁의 첫 관문으로 관심을 모았던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산하 민간자문위원회의 개혁안 제출 일정이 미뤄지면서 첫 단추부터 제대로 꿰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연금특위 자문위원인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을 만나 연금특위의 쟁점에 대해 물었다. 오 위원장은 서울대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 2001년 민주노총에서 연금 정책 업무를 시작해 현재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위원을 겸하고 있는 대표적인 연금 전문가다. 진보 진영이면서도 복지 증세의 필요성 등을 제기하며 진보 시민사회단체나 노동계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왔다.
-앞으로 연금개혁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 원래 1월 말까지 내기로 했던 자문위 보고서가 늦어지고 있다.
“이달 말 자문위 개혁 권고안이 만들어지면 국회에서 가입자 단체 중심으로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고 공론화위원회를 거치게 된다. 연금특위 활동 기한이 4월까지지만 실무적으로 시한을 맞추기 어렵다. 몇 달 순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핵심은 국민 500명으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다. 5~6월경에 공론화위 안이 나오면 그것을 중심으로 국민연금법 등 법률 개정을 하게 된다.”
-지난 정부가 두 번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었다.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 문제는 결론이 나온 데 비해 대입제도 개편은 똑 부러진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비전문가들이 최적의 개혁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연금 문제가 원전이나 대학 입시보다 더 어렵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치열하다. 공론화위에서 합의안이 나오지 못하면 연금특위 논의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공론화위는 국민을 대표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숙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공론화위에서 안이 나오면 그 권위를 부정할 수 없다. 공론화위에서 합리적이고 적절한 매듭이 지어지길 바란다.”
-공론화위원회가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
“연금특위와 투트랙으로 복지부가 오는 10월 국회에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제출한다. 그 정부안을 가지고 국회에서 다시 논의하는데 여러 정치 일정과 겹쳐서 조금 뒤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내년 4월 총선 때문에 그다음 국회에서 논의를 시작할 테고, 그렇게 되면 윤석열정부 임기 후반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복지부가 연금특위를 지원하면서 공조하고 있다.”
자문위는 국민연금의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생애 평균소득 대비 노후 연금액 비중)을 조정하는 데 집중해왔다. 소득의 9%인 보험료율을 15%까지 인상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으나 현행 소득대체율 40%를 유지하는 ‘더 내고 그대로 받는’ A안과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는 ‘더 내고 더 받는’ B안 두 의견으로 큰 흐름이 나뉘었다.
그대로 복수안을 제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8일 연금특위 간사인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이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문위 김연명·김용하 공동위원장과 회동 후 그간의 논의를 뒤엎고 “구조개혁에 매진해 연구하고 검토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밝혔다. 연금개혁에서 구조개혁은 공무원·군인·사학연금을 비롯한 특수직역 연금을 국민연금과 통합하는 등 연금 체계의 구조를 바꾸는 큰 틀의 개혁을 가리킨다. 강 의원은 구조개혁 과제로 기초연금과 퇴직연금 등을 언급했다. 보험료율 인상 가능성이 전해지며 여론이 악화되자 국회가 논의 방향을 급선회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연금특위 자문위원회는 왜 단일안을 만들지 못했나.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자는 보장성파와 재정안정이 우선이라는 지속가능성파가 접점을 찾지 못했다. 사회 전체가 진영화되다 보니 복지 정책도 진영화되고 있다. 시민들은 이분 구도가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것을 찾는데 오히려 전문가 집단이나 복지 시민단체, 정치권이 논의를 가로막고 있다.”
-외국 연금개혁 선례를 참고할 수 없었나.
“우리 상황은 연금 선진국과 너무 다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심각하게 미래 재정이 불안정한 나라다. 서구의 방법을 쓰면 고강도 개혁안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은 연금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는 나라다. 연금은 기후 문제처럼 지금 우리의 결정이 30~40년 후 미래의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설계해야 한다. 서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진통을 겪으며 연금개혁을 해왔는데 국민연금은 지난 15년간 아무 개혁도 하지 못했다. 세대 간 제도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오늘날 국민연금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본다.”
-B안처럼 더 내고 더 받는 것은 왜 어려운가.
“전문가마다 계산법이 조금 다르지만 저는 소득대체율을 10% 포인트 올리려면 보험료가 5% 포인트 정도 추가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건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값만큼만 보험료를 더 내는 것이다. 피자에 토핑을 추가하면서 추가한 토핑 가격만 내는 셈이다. 현행 제도의 부족한 재정은 사실상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금 소진 연도로 보면 A안은 13년이 늦춰지고 B안 역시 8년 늦춰진다.
“소진 연도가 연장되면 재정이 안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착시일 뿐이다. 보험료를 올리면 당장 연금이 쌓여 소진 연도가 무조건 늦춰진다. 그런데 소득대체율 인상은 소진 연도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청년 가입자의 경우 보험료 납부 이후 30년, 40년 후에 지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축구로 치자면 소진 연도는 하프 타임까지만 보여주는 지표다. 우리 국민연금 재정은 전반전에 5골을 넣고 후반전에 10골을 먹는 것과 같다. 전반전에는 서구 기금의 수십 배가 적립돼 있지만 연금이 소진된 이후인 후반전에는 재정이 급속도로 나빠진다. 축구는 후반전까지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기금 소진 연도가 당겨지면 재정이 악화된 것이니까, 소진 연도가 늦춰지면 재정이 개선됐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기금 소진 연도 연장을 재정개혁의 지표로 삼으면 안 된다. 전혀 재정 안정화를 이룬 게 아닌데 국민들에게 현실을 다르게 인식시키고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게 할 수 있다. 이번에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문제는 5년 뒤, 10년 뒤에 계속 드러난다. 보험료 인상을 소득대체율을 올리는데 이미 써버렸기 때문에 그때는 쓸 카드도 마땅치 않다.”
-더 내고 더 받는 게 불가능하다면 보장성을 강화할 방법은 무엇인가.
“노후소득 보장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국민연금 하나로 하려 하지 말고 기초연금과 퇴직연금으로 다층연금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직장인에게는 회사가 월급의 8.3%를 내는 퇴직연금이 적립되고 있다. 작년 국민연금 전체 지출이 30조원이었고 기초연금은 20조원이었다. 윤석열정부 공약대로 기초연금이 40만원으로 오르면 지출이 비슷해질 정도다. 다층 체계가 되면 적절한 노후소득 보장 플랜을 짤 수 있다.”
-거의 모든 국민연금 기사에는 국민연금을 해산하고 지금까지 낸 것을 돌려달라는 댓글이 붙는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정말 어려운 숙제다. 국민연금이 적자로 돌아설 때쯤 신규 가입할 청년들이 과연 순순히 이 제도를 받아들일까 우려된다. 우선 현세대는 개혁이 지체된 데 대해 진지하게 사과하고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개혁을 더 늦추지 말자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불만이 있겠지만 엄격히 얘기하면 청년들도 국민연금의 시야에서 보면 여전히 현세대다. 진짜 문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가 연금을 내야 하는 시점이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때까지 인구나 경제 조건을 개선해 미래 아이들이 이 제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국민연금을 개혁하려면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부터 손대라는 반발도 있다.
“집단 간의 반목과 형평성 논란이 뿌리 깊다. 국민연금으로 통합하는 게 맞다고 본다.”
-유럽 사례를 보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연금을 개혁하기까지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구에서는 1990~2010년 가장 큰 연금개혁이 있었다. 보험료를 일부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깎고 수급 개시 연령을 뒤로 늦추는 개혁도 했고, 수명이 길어지거나 경제가 나빠지면 자동으로 지출을 줄이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연금은 깎이지만 지속 가능해졌다. 덕분에 2010년 이후 연금개혁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많이 약화됐다. 긴 논의를 통한 사회적 합의로 상당한 구조개혁을 해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연금개혁은 성숙한 시민 의식과 세대 간의 신뢰에 기반한 사회적 대타협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연금개혁을 경제적 득실 논리로만 접근하면 해법이 없다. 연금개혁은 연금정치다. 개혁 과정에서 그 사회의 가치, 공통의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구의 수급자들은 자동으로 급여를 낮추는 장치를 받아들였다. 우리 여론조사에서도 내 이해관계만 따지면 더 내는 연금개혁을 반대하지만 자녀와 손주 세대를 위해서라면 책임 의식이 발동한다. 시간은 걸리더라도 국민들이 책임 있는 논의와 성숙한 판단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것 외에는 경로가 없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