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로, 기업으로… 이제 文밖에서 ‘각자도생’

입력 2023-02-25 04:05

문재인정부에서 차관을 지냈던 ‘늘공’(직업 공무원)들이 퇴직 후에 각자도생의 길을 찾고 있다. 정치권에 발을 들인 이들부터 국책연구기관과 대학교에 둥지를 틀거나 기업 사외이사를 맡는 이들까지 택한 길은 다양하다. 차관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일찍이 부처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들도 적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10일 “현 정부의 인사철학 중 하나는 ‘전 정권 사람은 쓰지 않는다’라는 말이 공무원 사회에서 돌고 있다”면서 “지난 정부 때 정무직(차관 이상)을 역임한 이상 미련 없이 제2의 인생을 알아보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선택폭 넓은 기재부 전 차관들

다른 부처에 비해 유독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의 선택지는 다양했다. 가상자산 업계로 뛰어든 김용범 전 1차관의 소식은 한동안 관가에서 화제였다. 김 전 차관은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해시드오픈리서치(HOR) 대표이사로 부임했다. HOR은 블록체인 투자업체 해시드의 컨설팅·리서치 자회사다.

김 전 차관은 또 지난해 3월 ‘격변과 균형’이라는 책을 펴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 등을 통해 현재 한국경제 상황을 진단하는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김 전 차관의 페이스북 팔로어는 7000명 가까이 된다.

국책연구기관에 둥지를 튼 이들도 있다. 공직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연구에 활용하는 사례다. 1차관을 지낸 이호승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빙연구위원으로, 이억원 전 1차관은 한국자본시장연구원 초빙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억원 전 1차관은 최근 삼프로TV 사외이사로 영입된 데 이어 패션기업 LF의 사외이사도 맡았다.

고형권 전 1차관은 보성산업 투자유치위원장 자리로 가게 됐다. 보성산업은 보성그룹 소속 종합부동산개발기업이다. 고 전 차관은 솔라시도, 세종·부산 스마트시티, 새만금, 청라금융단지 등 대형 프로젝트에 힘을 보탤 것으로 보인다. 앞서 고 전 차관은 지난해 8월부터 3년 임기인 기재부 산하 공공기관운영위원회 민간위원을 맡은 사실도 알려졌다.

정치적으로 더불어민주당과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전임 기재부 2차관들도 각자 살길 찾기에 나섰다. 2차관을 지낸 구윤철 전 국무조정실장은 최근 경북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임명됐다. 경북 성주 출신인 구 전 실장은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안도걸 전 2차관도 전임 박재완 전 장관에 이어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외이사를 맡게 됐다. 둘 다 퇴직한 지 10개월 만의 자리 이동이었다.

의회 진출을 꿈꾸는 이들도 있다. 문재인정부에서 초대 2차관을 맡았던 김용진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총선 출마 재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김 전 이사장은 지난 총선 때 민주당 후보로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안 전 차관도 광주 지역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기재부 2차관은 예산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정치권과의 접촉면이 넓다. 그래서 2차관 자리는 여의도 입성을 향한 지름길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산업부·국토부 차관들은 기관장행

산하기관이 비교적 많은 정부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국토교통부의 전임 차관들은 주로 기관장직을 맡는 경우가 많다. 전 정부에서 차관을 했지만, 새 정부 기조에 맞춰 업무를 해나가게 된 것이다. 이인호 산업부 전 1차관은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으로, 정승일 산업부 전 1차관은 한국전력공사 사장으로 각각 재임 중이다. 우태희 전 2차관도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으로 근무 중이다.

국토부에서는 박선호 전 1차관이 해외건설협회 회장을 맡고 있고, 손병석 전 1차관은 코레일 사장으로 근무했으나 지난해 7월 사임했다. 맹성규 전 2차관은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며, 김경욱 전 2차관과 김정렬 전 2차관은 각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한국국토정보공사(LX)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김양수 해양수산부 전 차관도 한국해양진흥공사 사장에 재직 중이다. 농림축산식품부의 김종훈 전 차관은 현재 전북도에서 경제부지사를 역임하고 있다.

관가에서는 정권교체 여부에 따라 장차관급 정무직 공무원들의 운명도 어쩔 수 없이 갈리게 된다는 이야기가 많다. 한 공무원은 “정권이 연장됐다면 전임 차관들이 장관직 혹은 대통령실로 가거나 더 좋은 기관장 자리로 가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며 “일찍이 기관장 자리를 찾아간 일부 인사 빼고는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다른 공무원도 “정무직 공무원은 좋든 싫든 해당 정권과 명운을 함께하게 된 셈”이라며 “새 정부에서 다른 자리를 맡을 기회가 와도 본인 스스로 민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난 정부 말기에 차관 승진한 일부 인사의 경우 축하보다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