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안위를 위해 애쓰고 걱정한다.’ 설 연휴에 들어선 고향집 벽에 걸려 있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다. 문뜩 눈에 들어온 것은 뮤지컬 영화 ‘영웅’의 울림 때문이었을까. 안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웅’이 상영되면서 안 의사의 면모가 소환되고 있다. 오는 14일은 안 의사의 사형 선고일이다. 안 의사는 사형을 앞두고 ‘우리의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주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의거가 있은 지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 의사 유언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간절한 유언은 여전히 유언으로 남아 있다. 그뿐일까. ‘국가의 안위를 위해 애쓰고 걱정한다’는 안 의사의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극심한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 진영에 속하면 동조해서는 안 되는 금기 영역과 비판해서는 안 되는 성역으로 양분된 결정을 강요받게 된다. 아니면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정치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프레임이란 ‘정신적 구조로서 반복된 학습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정치인과 언론 매체의 지속적 선동으로 무의식적 생각을 의식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고 집단적 사고를 형성하게 한다. 프레임을 반복해 집단주의적 사고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다. 진영에 속했다는 소속감이 진영 논리로 빠져들게 하고 진영 정치로 확장한다.
진영 논리로 만들어진 자신들의 영역은 점점 더 견실해진다. 건설적 경쟁의 장으로 발전돼야 할 이념적 균열을 프레임으로 포장해 목적에 맞춰 왜곡을 강화시킨다. 이성적 판단을 잃은 사회는 민주주의 근간을 위협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 권리조차 무너진다. 금기는 사실보다 감정에 치우쳐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어 대중주의로 함몰되게 만든다. 성역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인 정신 승리로 진화시킨다. 민주주의에서 지양돼야 할 금기와 성역이 지향되고 강화된다.
일반적으로 제도가 방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지의 비극’을 통해 인위적 규제가 어떻게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지 설명한다. 어자원 고갈을 막기 위해 정부가 규제책을 실시한다. 어민들은 정부 규제가 어자원을 보호할 거라는 믿음에 마구잡이 어획을 벌여 어자원이 더 빠르게 사라진다. 제도의 역설이다. 어자원을 공유하는 어민들끼리 상호 조절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무너진 것이다. 제도는 수평적인 사회 연대를 통해 실현된다. 사회 연대 없이 임의로 작동하는 제도는 제도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떨까. 사회적 동의를 찾기 어렵다. 제도가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대안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합의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애쓰고 걱정한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구심점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정체성을 바로잡는 것이다. 독립공채 상환, 안 의사 유해 봉환 등이 그 논리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혼이요 정체성인 것이다.
미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시작하자. 안 의사의 쉼 없는 민족애를 재발견해 오늘 우리의 행위규범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유해 봉환을 재추진하고, 이슈화된 3만원권 화폐 도안 인물로 안 의사를 채택하자. 일본의 반복되는 역사 왜곡, 독도 망언 등에 맞서 우리 민족정기를 선양하자는 뜻도 있다. 과거 일본의 1000엔권에 이토 히로부미 초상이 들어 있던 적이 있었다. 안 의사를 화폐 인물로 하자는 것은 결코 국수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안 의사는 평화론자였다. 공동체인 동양평화회의 설립을 113년 전에 주장한 사상가였다.
안 의사는 의병 장군이자 구국 영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세운 교육가로, 국력이 신장된다면 우리 문화가 통용할 것이라 확신한 선각자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한류로 문화강국이, 정보통신기술(ICT)로 기술강국이 돼 세계평화와 공영을 위한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이익을 보았을 때는 정의로운지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쳐라’는 안 의사 좌우명은 진영 논리에 함몰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되새겨야 할 의로운 좌표다. 죽음 앞에 초연한 안 의사의 숭고한 정신과 행동규범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이기 때문이다. 안 의사의 양식과 가치를 소환해야 하는 이유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