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입력 2023-02-06 04:08

고립된 섬에 서로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10명이 초대를 받는다. 영문도 모른 채 모인 이들은 첫 저녁식사 뒤 하루에 하나씩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시체로 발견된다. 각자가 두려움에 절망하지만 누가 범인인지는 모두 죽어나갈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오늘날까지도 다양하게 변주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고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줄거리다.

극 중 긴장이 극에 달하는 건 누가 범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다. 등장인물은 저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추리를 해보지만 각자가 어느 정도 의심을 살 구석과 동시에 알리바이도 가지고 있다. 누가 범인일지 갈팡질팡하는 사이 하룻밤이 지나고 또 한 명이, 또 다음 날 다른 한 명이 연이어 죽어나간다. 그렇게 결국 섬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요즘 국민연금 개혁을 두고 다시 입씨름이 한창이다. 보험료를 얼마나 올리고, 또 노후소득을 얼마큼 보장할지 논쟁이 5년 전처럼 반복된다. 복잡한 데이터와 전망치가 눈을 어지럽히지만 결국 근본 문제는 하나, 인구가 줄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가 그대로 악화일로를 걷는다면 개혁을 한다 한들 전망은 다시 더 암울하게 바뀔 것이고, 우린 또 이 입씨름을 반복할 것이다.

정부는 새해부터 인구 문제에 나름 대책을 내놨다. 단순히 말해 아이를 낳으면 돈을 준다는 것이니, 사실 이전 것과 큰 차이는 없다. 여기에 아이 맡길 곳을 더하고 시간도 늘려준다 했지만 그로써 문제가 해결되리라 보는 이는 없다. 우리뿐 아니라 제아무리 선진국이라도 인구 감소에 명확한 해결책을 못 내놓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출산율은 그들과 비교해도 절반이다.

출산율 감소의 진짜 범인이 누군지 저마다 원인과 분석, 대책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번 정부에서 의아할 만큼 용의선상에 거론되지 않는 게 있다. 아이를 낳아 키울 이들이 처한 노동환경이다. 집권 초부터 노동시간 연장과 임금인상 억제, 노조 강경 대응에 몰두하는 정부다 보니 아마 거론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통계가 보여주는 노동환경과 출산율의 관계는 분명하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2020년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월 소득 100만원 이하 저소득자를 제했을 때 남편과 자신이 적은 시간 일하고 소득이 높을수록 여성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다. 아직 전근대적인 보육 분담 문화, 임금 격차 탓에 자신보단 남편의 소득과 노동시간, 정규직 여부가 더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긴 했지만 가정 구성원이 처한 노동환경이 안정적일수록 출산율도 높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심지어 기업가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를 봐도 연령·학력·거주지 등 다른 요인을 동일하게 전제할 때 저소득층 출산율은 고소득층의 39.1%에 불과했다. 굳이 일자리 통계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비교적 안정적 일자리인 공무원·공공기관 직원이 모여 사는 세종시가 가임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에서 지방자치단체 선두를 7년 연속 고수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물론 소설처럼 용의자를 하나로 좁힐 수는 없다. 보육제도나 집값, 성차별 등 원인으로 꼽을 건 많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을 외면하거나 악화시킨다면 해결에 가까워질 리 없다. 파생될 국민연금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가 앞장서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노동시간을 늘리는 와중에 월급에서 가져갈 보험료만 2배 가까이 늘리면 과연 저출생이 근본 원인인 국민연금의 숙제가 속시원히 해결될까.

섬에 모인 손님들을 죽인 진범은 결말에서 드러난다. 과거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은 자들에게 범인이 나름의 응징을 내렸다는 결론이다. 그들이 지은 죄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은 꼴이다. 우리 사회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저출생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끝끝내 외면한다면 우리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없었다고, 우리 역시 되뇌어야 할지 모른다.

조효석 사회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