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처벌 ‘범단죄’… 점조직화·비대면 범죄엔 속수무책

입력 2023-02-03 04:08

지난해 7월 전국을 돌며 218차례 교통사고 보험사기극을 벌인 일당 144명이 경찰에 무더기로 검거됐다. 일당 규모도 크고 16억원의 보험금을 챙기는 등 조직적 범행을 저지른 만큼 경찰은 범죄단체조직죄(범단죄)를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적용하지 않았다.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 마포경찰서 관계자는 2일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모인 일당을 ‘단일 조직’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며 “주범 외에 ‘고수익 알바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가담한 사람들에게도 애초 범행에 가담할 고의성이 있었는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보이스피싱, 마약범죄, 보험사기, 중고차 사기 등의 범죄가 조직범죄화 경향을 보이면서 경찰이 범단죄 적용을 검토하는 사건이 늘고 있다. 범단죄는 징역 4년 이상의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하면 범행을 저지른 것과 같다고 보고, 중하게 처벌하는 죄목이다. 경찰청 수사부서 관계자는 “과거에는 조직폭력배 등에 제한적으로 적용됐다면 최근엔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화이트칼라 경제 범죄와 마약 범죄 등에 많이 적용된다”며 “이런 조직범죄의 건수나 피해 금액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범단죄 적용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범단죄가 적용되면 형량 역시 무거워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경찰들은 ‘단체’로 볼 수 있는 연결고리가 포착되면 우선 이 혐의 적용을 고려한다고 말한다. 서울 일선서의 한 수사팀장은 “과거에는 ‘행동강령이 존재해야 한다’ 등 판례상 적용 기준이 까다로웠지만, 2015년 보이스피싱 조직 사건에 처음으로 이 혐의가 인정된 후 법원에서도 보다 폭넓게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어 “공범과 가담자들도 더 엄하게 처벌할 수 있어 웬만한 조직범죄엔 모두 적용하려는 경찰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미성년자 성착취물을 생산·유포했던 ‘n번방 사건’이 대표 사례다. 주범 조주빈에게는 범단죄가 적용돼 40년 이상의 징역형이 확정됐다. 텔레그램으로 만난 n번방 공범들이 행동강령을 두거나 구체적 역할분담을 했던 건 아니지만, 재판부는 이 방의 운영 목적이 범죄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이들을 ‘범죄집단’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범죄단체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암약하는 등 ‘점조직화’되고 비대면으로 범죄가 이뤄지면서 혐의 적용이 어려워지는 애로사항도 있다. 서울경찰청에서 마약범죄 수사를 전담하는 한 경찰은 “전체를 일망타진하는 게 아니라 중간선부터 잡으면서 수사를 확대하는데, 범단죄를 적용하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찰들은 n번방과 마찬가지로 결국엔 수사기관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경찰청의 또 다른 수사부서 관계자는 “전형적인 조직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수사를 통해 이들이 ‘범죄단체’라는 사실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다”며 “조직범죄는 더 악질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범단죄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